임진왜란은 한국의 군사사 연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많은 연구가 선행되었으나 당시 조정의 전쟁준비, 전쟁지도 및 군사력 운용에 대한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다. 조선의 군사체제가 작동하는 과정은 16세기 조선의 군사체제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임진왜란의 전체 진행상황과 연계하여 객관적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초기 일본군의 신속한 한성 점령과 대규모 전쟁의 휴유증에만 주목한 나머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사체제는 총제적으로 부실했다는 평가를 면하기 어려웠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뿐만 아니라 16세기 조선의 군사체제까지 왜곡하여 보는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본 논문은 임진왜란 초기의 전쟁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조선의 군사체제가 작동되는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당시 조선은 군사체제가 문란하고 전쟁대비가 부족하여 전쟁 초기 무기력하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는 기존의 연구 시각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이다. 전쟁은 군사체제가 작동되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임진왜란 초기 전쟁사의 고찰은 당시 조선의 군사체제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객관적 시각을 제시해줄 것이다. 이에 사료의 서술에만 의존하는 기존의 전쟁사를 군사적 관점에서 보다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군사체제를 연구하였다.
조선은 16세기를 거치며 여진과 왜구의 위협에 대한 인식을 하였고 임진왜란 이전부터 일본과의 전쟁을 대비하였다. 북방의 번호여진과 군사적 충돌이 지속되었으나 조선은 적극적으로 대응하였으며 남방에서 삼포왜란, 을묘왜변을 비롯한 각종 왜구와의 전쟁을 치렀다. 일본의 전국통일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 진출에 대한 계획을 추진하였다. 조선은 히데요시의 의도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기존 왜구와의 전쟁을 참고하여 1만 여명의 병력 또는 그 이상의 군사력을 보유한 왜구를 상정하고 남방의 위협을 대비했다. 그러나 통신사 파견 이후 비로소 일본과의 대규모 전쟁이 임박했음을 인지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조선의 전쟁수행방식은 군권을 분리시키고 위기가 발생하면 군권을 위임하는 조선의 군사적 전통을 기반으로 진행되었다. 조선은 외부로부터의 국방을 위한 지방 군사력의 운용과 함께 왕조의 최대위협인 내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지방 군사력을 통제하고자 군권을 분리하여 운용했다. 대외전쟁을 수행함에 있어 초기 대응은 해당 지방군이 실시하였다. 그러나 지방군의 초기 대응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처리되지 않는 경우 왕으로부터 군권을 위임받은 경장(京將)이 정예병으로 구성된 중앙군을 이끌고 해당 지방으로 파견되어 상황을 마무리했다. 지방군이 중앙의 승인 없이 해당 도(道)를 넘어 운용될 수 없었기 때문에 적변을 맞은 지역 이외의 지방군을 운용하고자 할 경우 중앙에서 이를 승인하고 통제하는 절차를 거쳤다.
군사체제에 있어 경장 파견의 기능과 발전이 반영된 결과 진관체제의 분군법이 제승방략의 분군법으로 변화되었다. 16세기를 거치며 조방장부터 도체찰사에 이르기까지 경장 파견의 기능은 점차 발전하였다. 경장은 파견시 금군(禁軍)의 일부와 한성에 있는 무장으로 편성된 중앙군의 정예병을 대동하고 해당 도로 이동하며 부대를 편성했다. 이 과정에서 역로망을 경유하고 제진별 운법(運法)에 의해 각 집결지에 대기 중인 군사, 군마, 군량, 전투물자를 취하며 이동했다. 각 도의 분군법(分軍法)은 경장 파견과 변화하는 국방상황에 의거하여 도별 제승방략에 반영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은 구축된 군사체제를 통하여 군사력을 운용하였다. 봉수망과 역로망, 관보 등 각 통신체계에 의해 신속한 정보전파와 함께 군사동원이 시작되었다. 병사, 수사가 제승방략에 의하여 동원된 각 제진의 군사를 운용하여 적변에 대한 초기 대응을 하였다. 감사 겸 순찰사는 상황을 판단하여 도내의 분군령(分軍令)을 하달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경상도 중, 북부 각 제진의 군사들은 분군법에 의해 지정된 집결지로 이동하였다. 일부 제진은 초기 대응중인 지방군 지휘관의 부대로 편성되었으며 일부 제진은 경장 부대로 편성되었다. 조정은 초동조치로 조방장부터 도체찰사까지 경장을 순차적으로 파견하였고, 궁극적으로 최상위 경장이 전쟁을 총지휘하였다. 중앙의 승인을 받음으로써 도내로 제한된 전라도 지방군은 도내를 벗어나 충주, 경상우도로 파견될 수 있었고, 제1차 전라도 근왕군 활동 또한 가능하였다.
한성이 함락되면서 조선의 군사체제는 총동원체제의 양상으로 전환되었다. 순변사 이일의 패전 소식이 보고되자 조정은 한성 방어를 위한 준비를 하고 도원수 김명원 역시 한강변에서 방어하고자 했다. 이후 도순변사 신립이 충주에서 패전하자 평안, 함경, 황해, 강원도의 군사동원을 위해 왕자들과 대신들이 파견되고 선조는 한성을 떠나 서진하며 행재소를 운용했다. 일본군 선봉대가 한성을 점령하자 유도군과 도원수 부대는 임진강 북안과 경기 북부로 후퇴하여 임진강 전선을 구축했다. 조정은 개성에서 평안, 황해, 전라도의 군사력을 도(道)외부로 운용하는 것을 승인하고 근왕령을 하달했다. 이후 삼도 근왕군이 북상하였으며 전라도 지방군은 지역방어의 성공 이후 계속적인 근왕 활동을 수행하였다. 평안도에서는 제1차 평양 전투 이후 조·명연합군의 활동과 조선군의 단독 작전을 통해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 선봉대를 평양에서 봉쇄하였다. 1592년 말에 이르자 조선군은 각 지방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명의 이여송 부대가 참전하기 이전 이미 전황극복의 단계에 근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