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소련의 해체로 냉전시대가 종식된 이후 주요 참전국 정부들이 중요한 비밀자료들을 공개하고 국제적인 학술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하면서 오늘 날까지 한국전쟁에 관한 중요한 사실들은 대략 밝혀질 만큼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아직 완전하게 해명되지 못한 부분이 존재한다. 한국전쟁 중의 북한-중국관계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최근에 와서야 러시아 자료의 공개와 중국 내 여러 회상자료를 통해 한국전쟁 중의 북-중관계도 베일을 벗고 있지만, 아직도 규명되어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아마 그 대표적인 예가 조·중연합사령부가 아닐까 한다.
조·중연합사는 1950년 12월 초,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만들어졌다. 연합사 사령관은 지원군 총사령인 팽덕회가 맡았으며, 김일성 은 이 기구에 북한군의 작전지휘권을 넘겨주었다. 따라서 1950년 12월 중순 이후 공산측에서 전쟁을 지휘한 것은 조·중연합사였다. 물론 이 사실은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따라서 이 연구는 조·중연합사령부의 연구가 이제 시작단계라는 점을 감안하여 먼저 이 기구가 성립되는 과정과 그 구성 및 활동을 규명해볼 것이다. 그러고 나서 조·중연합사의 전쟁수행 및 해체요인 등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그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조·중연합사의 실체를 재조명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조·중연합사가 북한에 대한 영향력 확대라는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중국의 전략적 산물이었음을 밝혀낼 것이다. 전쟁 지휘의 효율성을 제고시키기 위함이라는 군사적 측면 외에 북한을 중국에게 정치적으로 종속시키고자 하는 전략적 계산하에 중국이 조·중연합사를 성립하려 하였음을 규명하는데 이 연구의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본 논문에서는 조·중연합사의 기원, 전쟁수행, 해체요인으로 크게 구분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먼저 조·중연합사의 성립과 관련해서는 중국군의 참전 목적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은 전쟁개입으로 인해 미국과 전면전으로 치달을 수 있음을 우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라는 '완충지대 확보'와 이를 통한 '북한에 대한 영향력 확대'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참전을 결심했던 것이다. 즉, 조·중연합사는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국의 정치 전략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의도를 바탕으로 중국은 참전 전부터 중국 주도의 협정안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중연합사를 구성하여 북한의 작전지휘권을 손에 넣고자 하였고, 김일성은 그러한 중국의 의도를 감지하여 이 기구의 성립을 계속하여 반대하였던 것이다. 결국 스탈린의 개입으로 12월 8일 조중연합사령부가 성립되었으나 중국의 이러한 의도가 전쟁 중 북한과 갈등을 불러일으킨 주된 원인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중연합사의 전쟁수행과 관련해서는 전쟁양상의 측면과 북한의 국내권력 재편성 측면에 미친 영향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조·중연합사는 연합사 성 립 이후 서울을 재점령하는 3차 전역부터 전쟁에 주도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전역에서 연합사 지휘부는 공산군이 37도선에서 공격을 중지하고 휴정休整)상태로 돌입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을 두고 김일성 등 북한지도부와 소련 군사고문단이 계속 남진을 주장하며 강하게 불만을 제기했으나, 연합사 지휘부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북한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연합사에 이양한 김일성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했는데, 이것은 한국전쟁의 전개 양상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조·중연합사의 구성으로 공산측의 작전지휘권을 중국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황은 중국의 의도대로 전개되었다.
한편 조·중연합사의 성립으로 작전지휘권을 상실한 김일성은 국내정치와 군구조 재편성에 눈을 돌릴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고, 그 결과 김일성은 전쟁 중에 정치적 경쟁자들을 숙청하고 북한군을 재편성할 수 있었다. 1950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북한군의 재편성·재무장으로 1951년 7월에는 정규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7개의 정규군단과 23개의 사단을 갖춘 체제로 개편되었다. 또한 김일성은 연합사 성립으로 작전지휘권을 상실한 대신 여유 역량을 국내정치에 쏟아 자신의 강력한 라이벌로 지목되던 박헌영을 비롯하여 무정·박일우·허가이를 당에서 축출하였다. 이들이 한때 북한 정치지형에서 각각 국내공산주의 출신과 연안의 조선의용군 계열, 그리고 소련계 한인을 대표했었음을 고려한다면 이들에 대한 숙청은 곧 김일성 중심의 단일지도체계가 전쟁 중에 급속히 확립되어갔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가능했던 이유를 작전지휘권 이양이라는 한 가지 사실로써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조·중연합사의 해체 역시 중국군의 참전 목적과 깊은 연관이 있다. 미국의 '북한지역 장악'을 저지함으로써 참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였고, 또한 조·중연합사의 구성을 통해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확고히 한 중국은 전쟁 전 상태를 유지하는 선에서 전쟁을 끝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조·중연합사령부를 지속 유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팽덕회의 귀국과 휴전협상을 거치면서 불거진 양측의 갈등은 연합사의 위상을 급격히 약화시켰다. 어느 한 가지 원인이 연합사가 약화된 직접적 원인이라고 꼽기는 어렵다. 다만 위의 원인들이 전쟁의 소강상태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결국 조·중연합사는 해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본 논문은 그간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조·중연합사의 실체를 어느 정도 드러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독선적 행동을 일정하게 견제할 수 있는 논리적 장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사실 전쟁 종결의 합의주체가 유엔군, 북한군, 중국군의 3자로 되어있기 때문에 형식 논리적으로 볼 때, 유엔군사령부의 지휘를 받는 한국군과 달리 북한군은 독자적인 전쟁 수행권을 지닌 주체로써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형성된 정전체제의 구도는 이후 북한이 정전기구에서 남한이 아닌 미국만을 상대하겠다는 통미봉남식의 독선적 태도를 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전쟁 중 조중연합사가 구성되어 북한군 역시 이 기구의 지휘를 받았다는 사실은 북한의 독선적 태도를 반박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