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박해의 종식은 기독교 박해 시기까지 신앙의 바탕에 깔려 있던 금욕적 삶을 교회의 세속적 변화에 의해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극대화 한다. 박해의 종식은 교회의 번영화 혹은 세속화로 진행되고 제도화되는 양상을 보이며 예배의 형식화가 시작했다. 헬라사상이 침투하였고 교회는 제국의 지지를 받고 번영하면서 교회 지도자들의 세속화도 진행되었다. 이런 상황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더욱 금욕적인 삶을 구하게 하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자 하는 은둔자의 생활로 나아가게 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금욕적 삶의 형태가 수도원의 시초가 되었다.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로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은 이집트의 안토니(Anthony,251-356)이다. 그는 주후 250년경에 태어났으며 20세가 되던 해에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라는 말씀에 감명을 받고 금욕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광야로 나가 생활하였는데 많은 추종자들이 그를 존경하고 그의 교훈을 들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안토니와 마찬가지로 은거하면서 기도와 명상, 그리고 예배 가운데서 구도의 삶을 살았다. 이러한 수도생활이 집단화되기 시작한 것은 파코미우스(Pachomius,290-346)에 의해서였다. 안토니의 수도생활은 개인적인 생활에 국한된 금욕생활이었지만, 파코미우스의 수도생활은 공동체의 금욕생활이었다. 이러한 수도생활은 확산되어 팔레스틴에는 안토니의 수도생활이, 그리스에는 파코미우스의 형식이 도입되었다. 이탈리아와 고울지방에서는 초기에는 개인적인 생활이 시작되었으나 나중에는 공동체의 수도 생활이 채택되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서방 학자들 중 가이사랴의 바질(Basil of Caesarea)은 수도원 정신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수도원을 창설하여 경건 훈련을 장려하였다. 수도원적인 이상을 보급하여 수도원 정신을 널리 전파하는 데 기여한 가장 대표적 인물은 투울의 마틴(Martin of Tour)이었다. 유럽 중에서도 이집트에 전파된 수도생활은 초기의 수도원 제도의 약점을 보완하고 새로운 수도원 운동을 전개하여 중세 수도원의 효시가 된 공동체, 누르시아의 베네딕트(Nursia of Benedict,480-550)에 의해 베네딕트 수도원 창설로 이어진다. 베네딕트는 수도원의 규칙을 새로 집대성하여 성공적으로 적용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의 수도원 운동을 따르는 자들이 유럽 전역에 확산되면서 기독교는 수도원 역사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 시기에 아일랜드에서는 독특한 형태의 수도원인 켈틱 교회(초기에 성 패트릭(Patrick)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어 활성화된 교회들이다)가 형성되었다. 이 지역의 수도사들이 스코틀랜드와 영국을 복음화 시켰으며 또한 영국으로부터 유럽대륙을 복음화 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에서 시작된 금욕주의자들의 공동체는 수도원의 모태가 되었다. 이러한 금욕주의는 그 평가 면에서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 요소를 남기면서 영성을 중요시 하고 있는 오늘 날 교회의 올바른 신앙적 삶에 가치관을 정립하는 요소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