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대규모 군사력과 주변 3개국이 투입된 국제전쟁으로써 16세기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성을 초래한 전환점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한국의 군사사 연구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이 전쟁은 7년간의 전쟁 기간 중 5년이라는 긴 시간이 강화협상으로 이루어져 있어 외교전으로도 인식되고 있다. 임진왜란에 있어 조선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은 전쟁에 대한 사전 대비가 없었고 미약한 군사력으로 일본군에게 크게 패하였으며 특히 일본과 강화를 맺는 과정에서는 협상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안일한 태도로 일관했다는 비판이 주를 이룬다. 조선은 배제된 상태로 명·일 강화협상이 진행되었다는 인식으로 인해 임진왜란 중 강화협상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명·일 강화협상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에 김영작 및 김문자는 인식조차 되고 있지 않았던 임진왜란 시기 조·일 외교 교섭에 대한 연구를 시도하여 이에 대해 명·일 강화 협상을 파탄에 이르게 했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이 연구는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조·일 외교 교섭의 사실을 확인하고 의의를 도출했다는 면에서 매우 고무적인 성과였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는 사실을 확인하고 조선을 무능한 정부로만 비판하는 의견에 반박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는데 그쳤다면 본 논문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을 현대 국제체제 속의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약소국으로 이해하고 조·일 외교 교섭을 조선의 대응 전략으로 재해석하여 약소국 외교이론의 일례로써 제시하고자 시도했다.
과거에는 없었던 국제정치 이론은 시간이 흐르면서 심화되고 발전한 것으로서 현대 국제체제 현상을 잘 설명해주는 틀이 되지만 근대 이전 사회에 적용 시키는 사례가 많지는 않다. E.H. Carr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 속의 사건들도 현대 국제정치 이론으로 분석해본다면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약소국 외교이론을 바탕으로 16세기 동아시아에서 조선의 정황을 살펴보면 대륙의 명나라와 급부상한 해양의 일본 사이에 위치하여 주변 강대국의 필요에 의해 침략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는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의 개념으로는 조공과 책봉체제를 바탕으로 한 명나라의 번국이지만 현대 국제정치 이론으로는 명나라와 편승동맹 관계였다고 이해한다면 일본이 조선에게 '가도입명'을 요구했을 때 조선이 중립을 선택하지 않고 동맹국 명나라를 선택하여 임진왜란을 겪게 된 부분도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또한 조선이 명나라를 선택했지만 일본의 침략을 방어할 만큼의 군사력은 없었는데 이는 군사력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대비하고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못했다는 시각에서 더욱 비판적으로 해석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모로우에 따르면 "국력의 비대칭적 조건하에서 약소국은 강대국이 보장하는 안보와 그들이 보유한 자율권을 교환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강대국에 편승한 약소국은 국력의 일부분만 국가의 안전을 위해 투입해도 자국의 안보를 보장 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국가의 여러 분야에 분산된 국력은 결국 자위력을 약하게 할 위험이 있고 이는 편승한 강대국에게 더 의존하게 함으로써 일부 주권을 침해당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조선도 명나라와 동맹관계로서 자국의 안보를 위해 군사력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기보다는 사회의 다른 분야에 분산하였고 그만큼 군사력은 약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임진왜란은 명·일 두 강대국과 약소국 조선이 치른 국제 전쟁이지만 승자가 없는 전쟁이었고 조선은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지만 결과적으로 자국의 안보를 지켜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6세기 조선의 정황은 자국의 안보를 지켜내기 매우 힘든 악조건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역사적 사실에 보다 입체적이고 다양한 시각으로 재접근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조선의 대응 전략 특히 조·명·일 삼국 간의 강화협상을 위주로 분석하여 조·일 외교 교섭이 가지는 의의를 통사적으로 재조명한 결과 약소국 외교이론의 외교 전략 중 일례로 제시할 수 있었다.
조선은 동맹, 비동맹, 중립, 고립, 집단안보 등과 같은 약소국의 몇 가지 외교 전략 중에 하나라도 선택할 만한 여력은 없었지만 영토가 분할될 것이라는 풍문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심유경과 고니시가 진행하는 명·일 강화협상의 내용을 확인할 필요성을 느꼈고 영토 분할을 저지해야 했다. 그래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의 대립·경쟁 관계를 이용하여 이간책을 사 용하고 비밀리에 조·일 외교 교섭을 시도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명당과 가토는 외교 교섭을 실시하는데 이에 대해 고니시는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조선과 명 측에 계속해서 서한을 보내어 가토의 외교접촉은 비공식적이고 지극히 사적인 의견으로 매우 잘못된 것이니 가토의 교섭 내용과 서한들을 본인에게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명·일 강화협상을 진행하는데 불안요소를 제공함으로써 협상 자체가 성급하고 파행적으로 진행되도록 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다시 말해서 조선은 영토 분할 위협을 분명하게 인식했으나 '고슴도치이론' 에서처럼 자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상대방에서 뚜렷한 손실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고 '거북이론'에서처럼 스스로를 장갑할 수 있는 철옹성 같은 방어막도 없었다. 그러나 다른 대안으로써 이간책을 통해 조·일 외교 교섭을 시도하여 명·일 강화협상을 좌절시키고 종국에는 조선의 영토를 그대로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조·일 외교 교섭이 명·일 강화협상을 파탄에 이르게 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출발한 기존의 연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이 약소국의 입장에서 자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조·일 외교 교섭을 시도하고 명·일 강화 협상에 불안요소를 제공함으로써 좌절시켰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즉 임진왜란 시기에 조선이 미약한 군사력으로 무능하게 대처했다는 일반 적인 시각은 약소국 외교이론을 바탕으로 조선의 상황을 이해하고 조·일 외교 교섭에 대해 심층적으로 연구 분석한 결과 약소국 외교이론의 한 예로써 제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본 논문은 네 가지 측면에서 연구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첫째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각종 문헌, 일기와 같은 1차 사료에 대한 연구 분석이 한국자료에 국한되어 있어 일본의 1차 사료를 참고한 비교·대조가 어려웠다는 부분에서 한계가 있으며, 둘째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일찍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기 때문에 보다 다양한 부분에 있어 심층적인 연구 성과를 달성했다고 평가되고 있지만 연구자의 한계로 방대한 일본의 연구 자료를 참고하지 못하여 양국의 자료에 대한 비교·분석이 이루어지지 못한 부분에서 한계가 있었다. 셋째 임진왜란 전간기에 이루어진 조·일 외교 교섭에 대한 기록이 『분충서난록』 이외에는 참고자료가 없어 사명당의 기록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점과, 임진왜란 종전 후 사명당이 도일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나누었던 회견 내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종전 후의 조·일 외교 교섭의 내용과 결과를 분석하는데 다소 제한적이었다. 넷째 약소국의 외교이론을 모든 약소국에 정답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는 부분이다. 이는 각 나라가 처한 상황이 시대적, 사회적, 환경적으로 모두 다르므로 취할 수 있는 외교 전략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일반적인 현대 국제정치 이론을 임진왜란이라는 평시가 아닌 전시 중의 조선에 정확하게 대입·분석하는 과정에서 부분적 모순 이야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와 과거를 구분하지 않고 한층 심화된 국제정치 이론을 역사적 사실에 적용한 시도는 앞으로 더욱 발전적인 연구의 한 방향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지속적으로 조·명·일 삼국의 1차 사료 위주의 자료를 수집하여 수정·보완하고 우리와는 다른 입장과 역사관을 통해 임진왜란을 조명한 중국과 일본의 연구 자료를 비교·분석함으로써 동아시아라는 큰 틀에서 임진왜란을 바라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