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최근의 무기수출3원칙의 폐기를 비롯해 일본의 전후체제를 상징해 온 비군사화규범의 변화에 착안해 1945년 패전 직후부터 1997년까지의 시기를 한정해 일본의 재계가 일본의 방위정책 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을 살펴보았다. 일본의 방위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변수로는 미국의 대일정책, 일본의 국가기구, 의회, 그리고 재계가 있으나, 본 논문은 이들 변수들 가운데 재계가 전후 일본의 방위산업 재건, 방위정책 수립과 방위력건설, 무기 국산화와 비군사화 규범의 형성과 폐지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밝히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경단련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재계와 방위정책 결정 간의 역학관계를 비군사화규범의 형성과 변천과정을 통해 밝히는 연구는 향후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방위정책의 행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주요한 요소가 될 전망이다.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이 글은 일본의 재계를 대표하는 경단련 산하 방위생산위원회가 일본 방위정책과 방위정책의 수립에 정치계, 관료계 못지않은 독립변수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1945년 패전 이후 형해화(形骸化) 됐던 일본의 방위산업이 냉전기를 거치면서 다시 부흥하고, 이를 바탕으로 방산업체들이 경단련 방위생산위원회를 중심으로 관계와 정계를 통해 어떤 요구들을 해나가면서 방위정책의 변화를 추동(推動)해 왔는가를 살펴보고자 했다.
본 논문은 서두에서 경단련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재계(財界) 조직이 미국 그리고 일본의 관계(官界), 정계(政界)라는 주요한 '독립변수'와 함께 일본의 방위정책이라는 '종속변수'를 변화시키는 데 기능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본 논문은 가설의 검증을 위해 편의상 비군사화규범의 공백기(1945~1967), 비군사화규범의 형성기(1967~1985), 비군사화규범의 완화기(1985~2000)로 구분해 재계의 역할을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경단련의 간행물인 『경단련월보(經團連月報)』, 그리고 경단련 산하 방위생산위원회의 소식지인 『방위생산위원회특보(防衛生産委員會特報)』를 1945년부터 2000년까지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입수해 분석했다. 예컨대 『특보』에 등장하는 정계-관계-재계의 방위관련 협의단체인 방위장비국산화간담회(防衛裝備國産化懇談會)의 활동과정을 특보를 통해 파악해 나가면서 방위정책의 형성과정을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제3장은 비군사화규범이 존재하지 않으면서 일본이 독립국가로서 무기수출과 방위생산에 주력하는 시기를 1945~1967년으로 규정하고, 이 시기 경단련 방위생산위원회 『특보』내용을 중심으로 정책결정과정에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살펴보았다. 특히 중국의 공산화와 한국전쟁 등으로 미국의 대일 점령정책에 전환이 생기면서 일본의 재계가 앞장서 헌법에 의해 금지당한 방위생산을 재개하는 과정을 서술했다. 한편, 방산업체들은 경단련 산하에 방위생산위원회를 설치해 이 위원회를 발판으로 미일 양국 정부에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해 나가는 과정도 포함했다.
제4장은 1967~1985년에 걸쳐 무기수출3원칙 선포 이후 일본의 방위정책에서 비군사화규범이 본격적으로 생성되는 시기를 맞아 방산업체와 정부의 방위정책과의 상관관계를 밝히고자 한다. 특히 1972년부터 시작하는 제4차 방위력정비계획이 결정되는 과정을 주목했다. 이 사례는 일본은 4차방을 계기로 방위산업이 질량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본격적으로 자주방위 구상이 시작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의 발발로 일본의 방위산업은 무기의 국산화를 추진하며 또 한 번의 활로를 찾는 듯했다. 그러나 1967년 사토 내각이 무기수출3원칙을 발표하고, 이후 일련의 비군사화규범이 양산되면서 방위산업은 활력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방산업계는 국산화를 통해 기술력을 높이는 한편, 경단련이라는 행위자를 통해 통산성과 의회, 그리고 방위산업 재건에 관심을 가진 보수인사들을 통해 여론을 조성하는 방법으로 생존을 모색한다.
제5장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를 파악해 비군사화규범의 완화기로 규정했다. 일본은 경제적으로 전성기를 구가했고, 방위산업의 기술력 축적으로 미국의 경계대상으로 떠오른 시기다. 이 시기는 일본의 방위산업과 방위정책을 옥죄던 비군사화규범들이 서서히 이완되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사례가 차기지원전투기(FS-X, Fighter Support eXperimental) 미일 공동개발이었다. 1985년 자주국방론자인 나카소네 총리는 '나카소네 구상(構想)'으로 알려진 자주국방 정책을 추진했고, 이에 따라 일본이 오랫동안 지켜온 '방위비 GNP 대비 1% 지출의 원칙'도 무너지고 무기수출3원칙도 대미 기술공여라는 명목으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요컨대 전후 일본의 방위정책과 방위산업은 냉전과 탈냉전의 시대를 거치면서 국제상황의 변화에서 궁극적으로 성장이 가능했던 것이며, 이러한 상황적 변화를 잘 포착한 재계의 움직임이 주효했던 것이다. 본 연구를 통해 '경단련의 방위생산위원회가 일본의 방위산업 성장과 방위정책 결정에 독립변수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가설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