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16세기 조선의 여진족에 대한 대외정책 및 군사전략을 분석한 것이다. 그 동안의 조선시대 군사사 연구는 군제와 정치사적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되어 왔으며, 16세기에 관한 연구는 임진왜란에 집중된 경향이 있다. 여진족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주로 조선 초기인 15세기의 여진동향에 대해 연구가 이루어져 왔으나 16세기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16세기 여진족과 조선의 접촉이 많지 않았고, 침략 횟수도 줄어들어 군사적으로 비교적 위협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6세기 후반에 들어 니탕개의 난, 누르하치 등의 대규모 세력이 일어나게 됨에 따라 여진족은 조선에 심각한 위협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6세기는 이처럼 조선의 대여진정책 변화에 과도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구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장에서는 16세기 국제정세의 변화와 여진족의 동향을 분석하였다.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불안정하였으며 동몽골과 왜구의 위협으로 명은 북로남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명의 요동지역 통제력을 감소시켰으며 조선 역시 정치적 불안정으로 여진에 대한 공세적 정책을 철회하였다. 해서여진의 호륜 4부는 국제질서의 변동을 기회로 대규모 부족연맹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16세기 중반부터는 명의 변경과 조선 국경을 위협하였다.
3장에서는 16세기 조선의 대여진정책을 3개 시기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먼저 연산군대~중종 초기(1494~1534)은 소극대응기로 여진에 대한 적대화가 심화되었으나 정벌은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였다. 연산군대에는 한 번의 여진 정벌 시도가 있었으나, 국력의 약화와 사화(士禍) 등의 정치적인 문제로 대외 정책이 정상적으로 추진되지 않았다. 중종 초기에는 두 번의 여진 정벌시도가 모두 무산되었으며, 폐4군 지역에 이주하던 건주여진을 몰아내는 정도의 군사력 사용이 있었을 뿐이다. 이 시기에는 여진에 대한 적대감이 강화되고 소규모 여진 침략이 계속되었으나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한 정벌보다는 국경 방어를 강화하는 정도의 소극적인 대응에 그치게 되어 이후 여진에 의한 국경침입은 계속되었다.
중종 중기~선조 초기(1534~1583)는 접촉단절기로 여진의 침략이 크게 감소하였으며 상호 간의 접촉이 없었던 시기였다. 당시 무역의 발달로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해서여진이 부족통합을 통해 연맹체를 구성하여 세력이 크게 확대되었으며, 건주여진은 명의 요동지방을 침략하는 일이 있었으나 조선 침략은 크게 줄어들었다. 또한 두만강 유역에서 거주하던 토착여진 세력, 즉 번호(藩胡)들이 이 시기 건주 및 해서여진과 무역의 중개역할을 하였다. 당시 초피(貂皮)·인삼 등 여진의 주요 생산품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여 조선은 이를 비싼 가격으로 구입하였으며 철제 농기구, 경우(耕牛) 등과 교환하였다. 또한 번호에 대한 지방 관리들의 수탈이 심화되어 조선에 대한 반감이 증가되었으며, 그 동안 조선의 군사력에 의존하여 만주 내지[深處] 우디캐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를 받던 이들이 조선의 군사력 감소를 의심하게 되었다. 또한 중종대에는 왕권의 약화로 명에 대한 사대의식이 심화되고 안보마저도 명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여진 정벌과 같은 적극적·공세적인 대외정책 보다는 강대국의 힘에 의존하게 되면서 군사적으로도 국경방어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선조 중기~후기(1583~1600)는 대응위축기로 여진족이 소규모 부족에서 점차 대규모 연맹으로 발전하여 명과 조선에 큰 위협이 되었으며 조선은 임진왜란이후 여진족을 통합하기 시작한 누르하치에게 수세적으로 대응했던 시기였다. 1583년 니탕개(尼湯介)의 난은 그동안 조선의 주민과도 같았던 번호들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서 6진 중 여러 진보를 함락시켜 북방 방어태세의 취약점을 노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번호들이 더욱 조선의 영향력으로 부터 이탈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군사력 약화를 보이면 언제든지 조선에 반란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북방지역으로 군사력을 집중할 수 없었던 조선은 전쟁 후에도 여진에 수세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누르하치의 건주위와 해서여진의 울라부는 조선 국경내의 번호를 흡수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다 충돌하였으며, 조선의 번호들은 결국 누르하치에게 흡수됨으로서 대여진관계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는 결국 군사력 약화로 인해 대여진정책이 위축된 양상을 보이게 된다.
4장에서는 대여진정책으로 인한 조선의 군사전략의 변화를 분석하였다. 국경 위주의 방어전략이 강화됨에 따라 군사력은 국경지대에 배치된 진보(鎭堡)와 구자(口子)에 분산 배치되었고, 군사력 소요가 증가되었다. 세조대 진관체제로의 변화는 내지의 방어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시도였으나 결과적으로 국경지대의 독진(獨鎭)을 강화하는 형태로 변화되어 국경위주의 방어체제는 계속 유지 되었다. 니탕개의 난과 울라부의 침입 등 16세기 후반 여진의 위협이 커지자 국경방어 위주의 군사전략으로는 여진족과의 전면전이 일어날 경우 방어할 수 없음이 증명되었다.
16세기 조선의 대여진정책과 군사전략을 주제로 한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은 의의를 갖는다. 첫째, 그동안 학계에서 연구가 드물었던 16세기 대여진정책과 군사전략이 군사사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짐을 밝혔다. 둘째, 16세기 대여진 정책이 시기별로 단계적 변화의 과정을 거쳤으며 각 시기별 특징을 설명하였다. 셋째, 대여진정책이 조선의 군사력과 군사전략에 미친 영향을 밝혔으며 대외정책과 군사전략이 상호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본 연구는 16세기 조선을 둘러싸고 전개된 주변 국가들의 이해관계의 대립과 조선의 군사적 대응을 고찰함으로서 현대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와 지정학적 특성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이해하도록 하는데 그 함의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조선의 대여진정책과 북방 군사전략을 이해함으로써 중-북 국경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전략적 함의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과 2차 자료들을 중심으로 연구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1차 사료들을 다루지 못한 것과, 실제 전투에서 나타난 전술 양상의 변화들을 다루지 못한 것은 본 연구의 한계가 될 것이다. 조선의 군사전략에 대한 부족한 부분은 더 많은 자료의 검토와 조선초기에서 중기까지 제도·사상·전략·전술·무기체계·전투양상의 변화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후속연구를 통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