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명당(明堂)은 한 해 수확물을 바치고 제사를 지내는 사직(社稷)의 기능, 종묘(宗廟)로서의 기능을 했던 장소, 임금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집행하는 정전(正殿)의 역할을 했던 장소였거나, 3가지 기능을 모두 수행하는 건축물로서 존재했다. 또한 조선 후기의 문신 윤기(尹愭)는 『무명자집(無名子集)』 「제8책」에서 명당의 기능을 천자가 제후를 조회하고 정령을 반포하는 장소, 정전(井田)의 제도와 정치를 밝히는 당(堂)으로 구분하였다.
풍수지리학에서 명당은 길지(吉地)의 의미로 사용되며, 땅에 대한 길지로서 '명당'은 조선시대 근본철학인 유교의 조상숭배 사상과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그리고 이기론(理氣論)이 결합하여 사회 전반에 흐르는 민간신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수록된 왕과 신하의 풍수 논쟁에서 국도로서의 명당과 궁궐로서의 명당 그리고 왕릉지로서의 명당의 구조와 형태를 파악하여 그 형태적 특징을 현대적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또한 이를 위해서 고대 한국과 중국의 역사서 중 명당과 관련된 사항을 파악하여 비교 분석하였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에는 길지를 명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국도의 관점에서는 궁궐이 국도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어서 명당의 개념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궁궐과 왕릉의 명당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전통적인 개념과 길지로서의 개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궁궐에서는 길지 개념의 명당은 교태전이 자리 잡고 전통적 개념의 명당은 근정전과 근정전 앞쪽의 조회 공간으로 신하들이 임금을 알현하는 품계석이 자리 잡은 공간이 이에 해당한다. 왕릉에서는 길지 개념의 명당은 능침이 위치하고 있다면, 전통적 개념의 명당은 정자각과 같은 제례 공간이 명당으로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명당은 길지로서 명당과 전통적 개념의 조회와 제례 공간으로서 명당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현대개념의 풍수는 전통적인 배산임수의 개념을 탈피하여 도시생활에 활용 가능한 풍수가 주류를 이루는 모습으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