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17세기 초 발생한 조선의 대규모 반란인 이괄의 난을 전후로 하여 조선의 후금(여진)을 방어하기 위한 체계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를 분석한 것이다. 방어체계의 변화에 이괄의 난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파악하기 위하여 첫째 17세기 이전 대여진 정책의 흐름을 살펴보고, 둘째 이괄의 난의 진행과정을 통해 이괄이 사용한 전략과 관군의 방어체계가 작동하는 모습을 분석하여, 셋째 이괄의 난이 방어체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방어체계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파악하였다.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가 흥기하기 전인 15~16세기에 조선의 대여진 방어는 국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15세기에는 적극적인 방어정책을 취하여 약탈을 취한 여진족을 정벌하였다. 수비 측면으로는 병영을 국경지역으로 옮기고 제승방략체제를 구축하는 등 피해를 경감하는 대책도 마련하였다. 16세기에 이르러 여진에 대한 대응이 소극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여진의 침입에 대한 정벌이 중단되었으며, 침입을 방지하기위한 외교적 노력이 증가하였다. 하지만 이는 성과를 보지 못해 여진의 침입은 계속되었다. 이에 조선은 산성을 쌓는 등 방어적인 대책 마련에 집중하였다. 1583년 니탕개의 난을 계기로 조선은 다시 여진을 정벌하려 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고, 오히려 정벌에 실패하면서 여진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내지의 방어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임진왜란의 경험이 종심 방어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으며, 종심 방어를 위해서는 후금의 침입로를 예측하는 것이 주요한 문제였다. 평안도의 존재하는 3개의 주요 도로 중 광해군대 가장 먼저 강조된 것은 강변읍을 건너 삭주, 구성을 거쳐 남하하는 내륙직로였다. 그러나 후금이 요동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의주, 선천, 정주를 거쳐 안주로 남하하는 의주대로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인조정권의 초기 대후금 방어체계는 광해군 대의 그것을 계승하는 형태였다. 다만 광해군과는 달리 친명배금을 내세웠으므로, 방어체계의 중요성와 필요성은 훨씬 더 높아지게 되었다. 이에 도원수는 평양에 주둔하며 적침을 방어하고, 부원수는 영변에 주둔하며 필요한 지역을 지원하는 형태의 방어를 채택하였다.
이괄의 난은 이러한 상황에서 발발하였다. 부원수 이괄은 영변을 출발하여 한양을 향해 빠르게 남하하였다. 당시 안주목사 정충신은 이러한 행동을 하책으로 판단하였지만, 이괄의 선택은 전략적으로 매우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대의명분이 없는 이괄은 자신의 병력을 더 늘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나, 팔도에서 병력을 모을 수 있는 관군은 점차 병력이 늘어날 것이 뻔했다. 다른 세력과의 연합은 그 성공을 장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걸릴 문제였기 때문에 선택할 수 없었다. 이괄은 조선의 중심(重心)인 인조를 향해 병력을 집중하기 위해 빠른 남하를 결정하였다.
이괄군의 남하는 관군의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당시의 방어체계는 주요 요충지인 안주, 평양 등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으나 이괄은 이를 우회하였다. 관군을 우회한 이괄은 이후로도 뒤쫓는 관군을 기동으로 따돌리고 남하하였다. 앞을 막는 관군은 사잇길을 이용하여 우회하거나 포위망이 형성되기전에 돌파하였으며, 임진강의 방어선은 내통자로 인해 힘도 쓰지 못하고 무너졌다. 관군의 평안도, 황해도 방어체계는 잘 작동하였으나, 이를 간파하고 있던 이괄군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인조는 이를 피해서 남하해야 했으며, 이괄군은 반정 개시 18일 만에 한양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후 추격해온 관군은 유리한 지형선정과 뛰어난 부대운용을 바탕으로 한양에 입성한 이괄군을 격파하였다. 패배한 이괄은 물러나 이천으로 향하던 중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이괄의 난은 진압되었다.
이괄의 난은 조선이 중앙군을 강화하고, 수도권방어체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영청을 설치하여 호위를 강화하고, 총융청을 통해 경기지역의 군사력을 정비하는데 착수하였다. 또한 보장처를 확보하기 위해 남한산성의 수축이 시작되었다. 남한산성은 2년 만에 축조가 완료되었으며 기존의 보장처였던 강화도와도 기각지세를 이루어 강화도의 방어 또한 자연히 강화되었다.
이에 반해 평안도 지역의 방비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괄의 난으로 인해 많은 군병들이 전사하거나 도망하여 평안도 방어 군병의 수가 급감하였다. 기존의 청천강 이북 요해처를 중심으로 하는 방어는 청천강 이남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내륙의 1차 방어 거점이 청천강변의 안주로 결정되었다. 이와 함께 적들이 사잇길을 사용할 것에 대한 우려가 나타났다.
이러한 방어체계의 정비는 대체로 적이 수도권을 공격하려 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명과 후금이 대치하고 있는 한 후금은 조선에 전력을 기울일 수 없었으며,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명이 이를 견제하려 할 것이었다. 실제로 정묘호란 당시 명은 후금의 조선침략을 비판하고 군사를 움직여 견제하였으며, 후금은 이로 인해 조선과의 화친을 서둘러야 했다. 인조정권은 이괄의 난으로 얻은 경험에 의존해 방어체계를 개편하였고, 이는 정묘호란에서의 실패로 나타났다.
인조정권의 기찰 강화는 성립되어있는 방어체계를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반정공신들은 반란을 두려워하여 이들을 색출해내기 위해 고변을 장려하고 기찰을 강화하였다. 기찰은 함정수사처럼 이루어졌으며, 이는 무신들이 군사훈련을 기피하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정묘호란 당시 조선의 방어는 쉽게 무너졌다.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한 병사들이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하지 못한 것은 불가능했고, 적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무너질 정도였다.
결국 이괄의 난으로 인해 조선은 방어체계를 수도권 중심으로 바꾸었다. 조선은 중앙군을 강화하고 보장처를 확보하는데 주력하였다. 또한 이괄의 난은 군사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괄의 난으로 평안도 군병의 대다수가 도망, 전사하였으며, 반란을 두려워한 기찰 강화로 인해 군사들의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상의 사실은 조선이 정묘호란에서 후금에 패배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