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소연 같기도 한 '백지에서 시작할 수는 없잖아요' 라는 이 논문 제목은 막막함에 대한 핑계의 어조를 띠고 있다. 막연히 백지를 마주하게 되면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린다'라는 표현은 일견 회화 작업을 연상시키지만,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도 종종 '글자를 그린다'라는 말이 쓰이듯, 그리기는 추상적 그래픽 기호를 포함한 여러 대상에 적용될 수 있다.
주어지는 문제가 없는 자율적 연구·작업 상황에서, '글자를 그린다'라는 행위는 '무엇'과 연관된 질문을 통과해 온전히 '어떻게'에 집중하게 한다. 그래픽 디자이너가 글자를 그리는 것은 어떤 면에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엇'을 건너뛰는 접근법은 그래픽 디자인의 일반적 특성과도 연결되어 보인다. 디자이너는 대개 주어진 내용을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작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글자를 그리더라도 '어떻게' 그리느냐는 그래픽 디자이너마다 다르고, 이 지점에서 그리기 위한 조건 설정과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여러가지 관점이 발생한다. 이 논문은 연구자 자신이 일정한 조건하에서 자율성을 조절하며 그린 글자 드로잉 연작을 통해, 제약과 개별성이 상호 작용하는 양상을 드러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