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에서는 '심법(心法)' · '전심(傳心)' · '심학(心學)' · '성어중형어외(誠於中形於外)' · '심정즉필정(心正則筆正)' · '심수합일(心手合一)' · '심수쌍창(心手雙暢)' 등으로 역대 서예의 명제와 주장을 아우르고 있는 서예의 서체 중에서 특히 고려시대 해서체의 구양순풍 유변(流變)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고려시대 유행하던 서체의 흐름은 초기 구양순 서풍, 중기 안진경 서풍, 말기 조맹부 서풍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양상을 바탕으로 당시 지속적으로 나타난 구양순풍 해서체의 유변에서 고려의 새로운 해서가 토착화한 양상을 초래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선 고려시대 해서의 성행배경을 과거제도의 시행, 비지(碑誌)의 성행, 통일신라 서풍의 계승 등의 역사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여 살펴보았다. 고려의 과거제도는 송에서 도입하였지만 과거제도의 시행으로 본관과 성씨 사용이 확산된 점은 과거제도 안에서 당나라와 연결 관계를 증명해주며 과거를 응시할 수 있는 계층이 확장됨으로써 해서의 성행을 짐작할 수 있다. 비지의 성행은 한반도는 고려 이전부터 대외교류가 활발했고, 특히 고려의 개방정책은 당나라의 정치 · 과거 · 군사 제도를 모델로 삼아 왕조를 개혁하려 했다는 점은 고려사회가 당나라 문화를 전반적으로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당나라 서예의 수용은 필연적이고, 해서의 상징인 구양순 해서가 유입되는 현상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고려시대 금석문 전반에 걸쳐 구양순 해서가 풍미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서풍의 계승은 통일신라가 고신라의 문화를 근저로 하여 고구려와 백제 문화를 융합하고 당의 문화를 가미한 것처럼 고려왕조 또한 통일신라를 근저로 하여 융합하고 당의 문화를 가미하여 계승하고 발전했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목판 인쇄술이 통일신라의 기술을 발판삼아 발전하여 고려의 대장경 기술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은 고려인의 불심과 해서의 활성화를 비례하고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 해서가 성행하게 된 경향을 이해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고려시대 해서체로 쓰인 금석문 가운데 국왕의 허가를 받아야만 세울 수 있었던 묘비명 8점과 고려가 건국된 이후에야 그 꽃을 피우게 된 묘지명 8점을 선별하였다. 해서의 황금기를 이루었던 당대(唐代)에서 '해서의 극치'라고 일컬어지고, 후세의 해법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구양순의 네 개의 비문 중 〈구성궁예천명〉과 서풍을 비교 · 고찰하였고, 〈구성궁예천명〉 · 〈화도사비〉 · 〈온언박비〉 · 〈황보탄비〉와 자형을 비교 · 고찰하였다. 그 과정에서 구양순의 해서와 고려해서의 계승 · 유변 된 양상을 확인 할 수 있다.
구양순 해서의 험경정발한 용필의 특징을 고려해서는 외유내강하며 온화하고 박충(朴忠)한 용필을 구현하였다. 평정한 가운데 험초(險峭)한 구양순 해서의 결구를 고려해서는 단정하며 유유(悠悠)한 가운데 간혹 시원스럽고 명쾌한 획을 혼재하였다. 매우 단정하고 절제된 필법과 긴밀하고 엄격한 글자의 짜임새의 구양순 해서를 고려해서는 온화와 당당함을 수축과 이완을 확장과 축소를 넘나드는 짜임을 절제 있게 구현하였다. 대체적으로 장방형을 이루고 있고 확연하게 오른쪽으로 상향하여 기울어진 구양순 해서의 가로획을 고려의 해서는 대체적으로 장방형을 이루고 있지만 가로가 긴 장방형, 세로가 긴 장방형도 이루고 있고, 자형의 가로획 기울기를 완만하게 또는 수평적으로 구사하여 자형의 형세가 성정이 깊고 차분한 사람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평온한 자형에서 친근감을 구현하였다.
아울러 당해의 변용과 토착화 한 양상은 구양순 해서의 필법처럼 엄격하거나 정밀한 모양은 아니다. 한 자형 안에 가로획의 다양한 기울기를 안배하고 점과 획의 연결을 자유롭고 부드러운 곡선을 구현한 자형을 혼재하였다. 즉 짜임새가 긴밀한 모습의 자형, 자유로운 모습의 자형, 율동적인 자형, 엄격한 자형 등을 조합하여 구현하였다. 그리고 자형의 모양이 세로가 긴 장방형, 가로가 긴 장방형, 정사각형, 사다리꼴을 한 자형도 있는데 상변이 짧고 아랫변이 긴 사다리꼴, 아랫변이 짧고 상변이 긴 사다리꼴이 있는가 하면 평행사변형의 모양 등 다양한 모양의 자형을 혼재하여 구현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가로획의 기울기와 길이, 자유로운 점과 획을 가진 자형의 모양을 조합하여 어수선하지 않고 조화로우며 균형적인 서풍을 구현하였다. 이렇게 주체적이고 개성적인 자유분방한 획을 절제 할 수 있었던 것은 완만하고 수평적인 가로획과 곧고 강직한 세로획의 필력과 필세가 있었기 때문에 자유분방함 속에서 안정적이고 온후한 형세를 구현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주목 할 점은 갈고리[趯]와 긴왼삐침[掠]이다. 즉흥적이고 유동적이다. 단정하고 섬세한 자형에 즉흥적이고 유동적인 갈고리[趯]와 긴왼삐침[掠]을 구현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구현의 형세는 절제 속에서 자유분방하고, 자유분방함 속에서 절제할 줄 아는 '지지불태(知止不殆)'로 정의 할 수 있겠다.
고려해서는 구양순 해서의 형태만 묘사하지 않고 진정한 법칙과 내면의 정신을 찾아 새로운 서체를 창작하였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즉, 완벽함에서 서서히 완벽함을 저항이라도 하는 듯한 변용을 거쳐 치우치는 것 같지만 균형적이고, 혼란스러운 것 같지만 질서가 있다. 자유분방함 속에서 깔끔하고 세련되고 넉넉하고 온화한 기품을 다 품어낼 수 있는 것은 '心'을 움직여 '지지불태' 할 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창작의 체현으로 탄생한 고려해서는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