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초상화는 인물화의 하나로 제작되어 왔다. 조선 시대의 초상화는 북송의 정이(程頣 1032-1085)가 언급한 말에서 유래한 '일호불사 편시타인(一毫不似 便是他人) 터럭 한 올이라도 닮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정신과 전신사조(傳神寫照)에 의해 단지 그림으로써 제작된 것이 아니라 그 대상 인물의 정신까지도 담아내는 완성도 높은 장르 중 하나였다. 특히, 조선 후기로 갈수록 유교 이념인 보본관념(報本觀念)과 숭현사상(崇賢思想)에 의해 사당(祠堂)이나 서원(書院)에 향사(享祀)·첨배(瞻拜)를 위한 초상화가 많이 제작되며 활발해졌다.
그중에서 자화상은 화가의 자의식이 드러난 작품으로, 그 대상이 초상화를 제작할 정도로 사회적 인정을 받는 인물이어야 하며 작가 또한 초상화를 직접 그릴 만큼 회화 실력도 뒷받침되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조선 시대의 자화상은 희귀해졌다.
강세황은 명문가였지만 일련의 사건으로 오랜 시간 동안 출사하지 못하다가 61세라는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가게 되면서 염원을 이뤘다. 그 후 70세에 관직을 상징하는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야인을 상징하는 야복(野服)을 입은 특이한 모습으로 〈자화상〉을 제작해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조선 시대에 많은 작품이 남아있는 초상화 중에서 자화상은 손에 꼽힐 정도이지만 유물의 보존과 안정성 측면에서 공개 및 전시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이에 본 논문은 초상화의 대상 인물에 따른 어진, 사대부상, 공신도상, 기로도상, 여인상, 승상 6가지 분류 중에서 어진, 사대부상, 공신도상 및 기로도상의 제작 과정 및 모사 과정을 살펴보고, 강세황 家 4대 초상의 비교 분석하여 가계(家系)에서 나오는 유전적 유사성을 통해 초상화 제작에 있어서 '일호불사 편시타인(一毫不似 便是他人)'과 '전신사조(傳神寫照)'와의 부합성을 알아보았다.
다음 장에서는 강세황의 생애에 대해 알아보고 〈자화상〉 작품 분석과 II장에서 살펴본 초상화 및 초상화 모사 제작 과정과 초상화에 사용되었던 표현 기법을 참고하여 진주 강씨 백각공파 소장의 강세황 70세 〈자화상〉 고색 복원 모사를 진행하였다. 고색 복원 모사를 통해서 시·서·화 삼절로 불렸던 강세황의 높은 예술성과 서양화법이 가미된 표현 기법들을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