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기독교는 한국의 근대화과정에서 국권 회복 운동, 자주 민권 운동, 반봉건 운동에 동참하여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한국인들의 의식을 고양하며 구습을 타파하는 사회 개혁 운동을 주도하였고,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게 한국인들의 독립의식을 드높였다.
본 논문은 가장 암울했던 역사 속에서 교회가 민족운동을 펼치는 민족교회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살피면서, 한국 교회가 유래없는 성장을 하게 된 특수한 한국적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구한말 조선은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있었다. 개항의 시기와 때를 같이하여 조선 선교가 전개되었다.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은 초기 기독교 시대와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역별로 차이가 있지만, 기독교의 성장과 함께 민족의식은 함양되었다. 서구사상의 영향을 받았던 개화파 지식인들이라는 소위 김옥균, 박영효, 윤치호, 서재필 등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갑신정변은 한국선교에 새로운 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기독교는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
1880년을 전후로 한 구한말의 역사적 상황은 매우 빠르게 전개되었으나, 한국민의 기독교 수용과정은 주체적이었다. 부패한 정부의 부정한 관료들 때문에 서민들은 경제적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고 심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더욱이, 외부세력의 침략까지 더해 서민들의 삶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처참하게 무너져가고 있었다. 개신교보다 먼저 선교 활동을 펼친 천주교는 한때 서민들에게 큰 희망을 주는 복음이 되었다. 그러나 유교의 반대에 부딪혀 심한 박해를 받았다.
농민들이 주동이 되어 일어난 동학농민항쟁(1894)은 봉건사회를 개혁하고 외세를 물리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을 구실삼아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와 각축을 벌이게 되었다.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의 연이은 전쟁의 승리로 한반도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1910년(경술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종말을 고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국권피탈 사건은 강압적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일본은 이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한일병합조약이라고 알렸으나, 사실은 발표된 조칙에는 대한제국 순종황제의 국새가 찍혀있지 않았다.
국권을 상실한 나라에 민족의 활로를 찾아 새로운 차원의 문화적, 정신적 각성과 국권 회복을 주도할 세력이 절실히 요청되던 때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반봉건 운동, 자주 민권 운동, 국권 회복 운동을 주도했던 구한말의 기독교는 또한, 민족교회 건설에 앞장을 섰다. 그리고 일본 군국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들이 국권 회복 즉, 독립과 민족의 미래를 지향하며 믿음을 가지고 사회변화의 주역이 되었던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만약 이 시기에 기독교가 시대적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했다면, 다른 세력 혹은 다른 종교가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시기에 개화파를 비롯하여 뜻있는 자들이 국가와 사회를 개혁하며 국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지만, 국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국제적. 정치적인 상황도 우리나라에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혼란한 시기에 사회, 국가 개혁의 주체가 되었던 기독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하나는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대 부흥운동으로 영적 각성과 미증유의 교회의 부흥을 경험하게 된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가 일제에 항거하여 거국적으로 일어난 1919년 3·1운동의 주된 세력으로 민족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일이었다. 이렇듯 기독교는 어려운 시기에 민족운동에 동참하며 민족과 함께 그 길을 걸어왔다.
구한말 기독교가 구시대의 적폐들을 청산하며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그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민족주의의 기반 위에서 나라의 독립을 지향하면서도 개혁의 의지가 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의 개혁적 사회, 정치운동은 자연스럽게 기독교 공동체의 이념과 조직에 편승하며서 독립협회 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기독교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보편적 가치 실현을 지향하였다. 종교적 신념을 가진 조직의 확대로 인한 기독교의 성장은 단순한 개혁세력이 아니었다.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가는 주체적인 세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