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葡萄)는 다산(多産)과 장수(長壽)를 상징한다고 여겨 서역에서부터 한(漢)나라를 통해 고려로 유입된 후, 그 열매와 시렁의 차폐성(遮蔽性)으로 인해 사찰과 궁궐뿐만 아니라 나아가 문인들의 정원에도 식재되어 온 귀한 과실이었다. 재배역사와 상징성을 바탕으로 실생활에서 문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포도는 조선시대에 공예품의 문양과 그림의 주제로서 빈번하게 활용되었으며, 사군자와 더불어 문인화로 즐겨 그려진 소재였다. 따라서 이를 처음으로 시작한 중국과 일본보다도 조선회화에서 뚜렷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학계의 관심이 요구되는 화제이다.
현재까지 조선시대 포도도 전반에 관해 진행된 국내의 연구는 1987년 『東亞史의 比較硏究』에 수록된 이원복의 「朝鮮時代 墨葡萄考」가 유일한 실정이다. 현재 포도도를 소장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간송미술관에서는 황집중과 권경에 대해 짧게 조명하는 글을 발간하였고, 그 외에도 포도 화가로 명성을 알린 인물 개개인에 관한 연구는 논문 및 단행본을 통해 꾸준히 저술되고 있다. 반면 전반적인 포도도의 전개와 시기별 화풍 분석에 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포도도는 조선 중기 신사임당(申師任堂)과 황집중(黃執中)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황집중은 변각 구도의 절지풍 포도도로 조선시대 문인화로서의 정형을 이룩한 인물로 당시 이정(李霆)의 묵죽(墨竹), 어몽룡(魚夢龍)의 묵매(墨梅)와 함께 삼절(三絶)이라 불렸다. 이후에 등장한 이계호(李繼祜)는 이전과는 구별되는 양상으로 전수식 포도도가 그려진 연폭 병풍을 남기고 있어 주목된다. 그는 황집중이 이룩한 포도도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포도 열매보다는 포도 잎의 무성한 표현에 몰두하는 개성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후 홍수주(洪受疇), 심정주(沈廷胄), 권경(權擎) 등을 통해 특유의 화풍을 형성하며 전개되어 온 포도도는 조선 말기에 이르러 최석환을 중심으로 많은 편화와 족자, 병풍을 전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국내 및 해외에 전해지는 조선시대 포도 그림들을 시대순에 따라 화가와 그 작품을 바탕으로 특징과 변화를 비교 정리하고자 하였다. 포도 한 가지 소재로 명성을 알린 화가들을 시기별로 나열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 포도도가 성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채색 없이 수묵만으로 그려진 묵포도가 주류를 이루고 초충(草蟲)이나 송서(松鼠) 등 동물의 등장 없이 오직 포도만을 소재로 다룬 그림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었다. 포도도로 이름을 알린 화가는 문인 화가들이 대부분이며, 화원으로서는 이인문(李寅文)이 알려져 있으나 한두 폭의 작품을 전하는 것에서 그칠 뿐이다.
나아가 앞선 연구를 바탕으로 시기별 대표적인 포도도 양식을 중점으로 규모, 구도, 줄기와 덩굴손 그리고 잎 표현 등의 측면에서 비교 및 분석을 통해 화풍 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파악하여 정리하고자 하였다.
조선시대 포도도의 시기별 양상과 회화적 특성 비교 및 연구를 통해 우리의 포도도 문화를 계승하고, 국내 및 해외에 전해지는 포도 그림들을 보존 및 계승하려는 의식 촉구의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