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초상화는 여러 목적에 의하여 다양하게 제작되는데 대상 인물의 형(形), 외형 모습만을 객관적으로 그려내는 뿐만 아니라 신(神), 곧 인물의 정신을 담아내는 전신사조(傳神寫照)에 입각하여 인물의 초상을 화폭 속에 담아내었다. 대부분 제의적인 목적으로 사회적 위치가 높은 지배층을 대상으로 숭배나 추모의 의미로 제작되었는데, 이에 초상화는 후손들에게 있어서 단순히 일반적인 회화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아닌 조상의 본질 그 자체라 여겼다.
대표적으로 어진, 공신상, 일반 사대부상 등 여러 유형의 초상화가 존재한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특징과 기법의 제작 방식이 여러 방면으로 변모해 왔다. 조선 전기, 중기는 성리학이 지배 사상으로 자리 잡히면서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선조나 명현들을 기리기 위한 영당, 서원 등의 설립이 이루어졌으며, 공신도형(功臣圖形)으로 초상화가 대거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전기에는 주로 얼굴과 의복이 표현이 선 위주로 표현되고 채색이 단조로워 간결한 느낌이 난다. 중기에는 얼굴에는 선의 표현이 점차 줄어들고 음영과 함께 얼굴 피부의 섬세한 묘사가 발현되기 시작하였으며 의복 또한 음영 표현으로 초기에 비해 회화성이 높아진 시기이다. 조선 후기는 조선 시대의 초상화가 가장 많이 제작되었으며 실학의 유입으로 경제가 발전하는 시기이다. 실학은 현실적인 필요성에 따라 객관적인 판단으로 효용성과 실용을 중시하여 한국 회화사의 새로운 업적들을 많이 남겼다. 여러 장르 중 초상화도 영향을 받아 조선 초, 중기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인물이 초상화의 주된 주인공이라면, 후기는 초상화의 대상이 확장되어 신윤복의 미인도와 같은 일반 인물이 그려지기도 하였다. 전통 초상화 기법과 서양화법이 적절히 수용된 인물의 사실적 표현이 발달되었다.
본고는 조선 시대에 나타난 표현기법 연구로 김홍도와 이명기가 합작한 일반 사대부상인 〈서직수 초상〉을 주목하였다.
앞서 두 인물의 생애와 초상화 제작 이력에 대해 분석하였다. 김홍도는 조선 후기 도화서 화원 및 관직에 근무하였고, 당대 최고의 화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여러 회화 장르에서 뛰어났으며, 강세황의 제자로 일찍이 재능을 인정받아 도화서 화원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는 총 5번 어용화사인 동참화사로 어진 제작에 참여한 인물이다. 이명기는 조선 후기 초상화 풍을 이끌어간 초상화가로서 명성이 높은 화가이다. 그는 27점의 초상화를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어진제작에서 주관화사로 2번 참여한 이력과 공신, 사대부 등 여러 차례 초상을 그려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러한 이력의 두 화원이 서직수의 개인적인 주문의뢰로 얼굴표현이 뛰어난 이명기가 얼굴, 몸체 표현이 뛰어난 김홍도가 몸을 담당하여 〈서직수 초상〉을 합작하였다. 조선 후기의 초상화 기법은 대표적으로 배채법, 육리문, 중채기법, 운염법 등이 분석된다. 이러한 기법들의 정의는 많은 선행연구가 진행되었으며 이론적으로 표명되어 있으나 실제 제작을 통한 표면적인 기법연구는 많지 않은 실정이다. 본고에서는 조선 후기 초상화 표현기법에 의거하여 그려진 〈서직수 초상〉의 상태를 선행연구 조사 및 실견조사 등을 참고하여 작품 해석, 채색, 장황으로 구분하여 세세하게 분석하였다. 실제 고색복원모사을 통해 분석내용을 토대로 복원모사의 제작 과정을 상세히 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