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에서는 오스트리아 작가 마를렌 하우스호퍼 Marlen Haushofer(1920-1970)의 장편소설 『벽 Die Wand』(1963)에 나타난 벽 모티프의 기능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벽』은 1963년에 출판된 하우스호퍼의 대표 작품으로서, 하루아침에 투명한 벽이 생겨 벽 바깥의 생명은 모두 죽음을 맞이하고, 벽 안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인 주인공이 대참사 이후의 삶을 기록한다는 설정의 소설이다.
벽 모티프는 여성문학에서 주로 한계나 은신처를 상징하였지만, 하우스호퍼의 벽 모티프는 이를 반전시켜 주인공이 본질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공간을 형성하는 경계로서 작용한다. 주인공은 벽 속에서의 삶을 통해 고정화된 가부장적 문명사회 속에서의 원치 않던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고, 벽 안의 자연 속에서 동물들과 함께 살아가며 자신을 차분히 돌아볼 수 있는 고요한 평화의 시간을 갖는다. 무엇보다도 이 과정을 글로 써 내려가며 자아를 성찰하고 발전시켜 나간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주인공이 벽 안의 공간에서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며 겪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넘어 자유와 평화를 찾아가는 과정은 작품의 독특한 서사 구조와 서술적 특징을 통해 극대화된다.
주인공의 내면이 변화해가면서, 벽을 대하는 태도 또한 자연스럽게 달라지는데, 벽은 더 이상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만드는 장애물도, 자유를 앗아가는 문명으로부터의 보호막도 아닌 무(無)에 가까운 논외의 대상이 된다. 벽이 생겨나며 시작된 모든 이야기는 이내 모든 것으로부터, 심지어 벽에 대한 생각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벽 모티프는 서사 전반에 걸쳐 문명과 자연의 경계로서 등장하며 유토피아적 자연을 범주화하고,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를 가르는 심리적 경계로서 기능한다. 궁극적으로 주인공이 글을 쓰는 계기를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정체성이 발현되도록 이끄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소설 『벽』에 나타난 벽 모티프의 기능을 분석하고, 현대 여성 문학에서 다루어진 벽 모티프의 양상을 고찰하는 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