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민족사학의 내용적 실체인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을 밝힌 연구이다. 필자는 평소 한국선도의 요체인 '홍익인간' 사상이 이제는 체계적인 이론과 학설로 정립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져왔다. 이에 한국선도의 홍익인간 사상이 지향하는 '생명 존중과 모든 생명의 조화로운 공생의 세계관'을 '홍익주의'로, 홍익주의에 기반한 역사인식을 '홍익사관'으로 명명하였다. 선도적 세계관의 요체를 홍익주의로, 선도적 역사인식의 요체를 홍익사관으로 바라본 것이다.
고려중기 서경천도운동을 진압한 유교세력은 중화주의에 기반한 유교적 세계관을 수용하여 홍익주의에 기반한 선도적 세계관을 폐기하였다. 중화주의는 '조화'보다는 '힘'을 우선시하는 패권주의적 세계관이며 이러한 세계관에 기반한 역사 인식이 중화사관이다. 동북아 상고·고대사 주역이었던 한민족 역사와 문화는 중화사관의 틀 안에 욱여넣어졌고 그 틀 안에 들어가지 않는 내용은 삭제되었다.
무엇보다도 한민족사의 출발점인 배달국 역사와 문화[선도제천문화]가 삭제되었다. 또한 단군조선 역사와 문화는 기자조선 역사와 문화로 변개되었고 단군조선의 중심 무대는 한반도내 평양으로 축소되었다. 유교 중화사관의 극점은 남인 실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원시유학에 관심을 두고 문화적 화이관을 수용하였기에 단군은 물론 단군조선마저 부정하는 퇴행적 역사 인식을 보였다. 또한 낙랑군 재평양설을 고착화시켜 한민족의 역사 무대를 축소하였다.
구한말 계몽사학은 유교사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도 못하면서 황국사관까지 수용, 유교사학과 식민사학의 접합 고리 역할을 하였다. 식민사학은 단군 및 단군조선을 부정한 남인 실학자들의 역사 인식에 기반하여, 한국 고대사를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으로 이어지는 중국 식민지의 역사로 바라보았다. 또한 고고학 유물까지 위조하여 낙랑군 재평양설을 공고히 하였다. 여기에 임나일본부설까지 추가, 식민사학의 타율성론을 완성하였다. '남인 실학자-식민사학'의 단군 및 단군조선 인식은 주류 강단사학으로 계승되었다. '남인 실학자-식민사학'의 단군 및 단군조선 인식의 골간이 유지되면서 여러 새로운 관점이 무원칙하게 추가되어 단군 및 단군조선 인식은 극히 모호한 상태가 되었다. 낙랑군 재평양설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선도사학은 새롭게 부활의 과정을 밟아가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선도사학은 대종교사학[민족사학]의 형태로 새롭게 등장하였다. 1910·20년대 독립투쟁의 사상적 기반이었던 대종교사학은 현재 '영토주의·국수주의'로 오인되기도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요청이었던 저항적 민족주의가 선도 홍익주의와 다르지 않음이 이해되면서 점차 오해가 풀려가고 있다. 1930·40년대에는 계급문제와 민족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했던 시대상황 속에서 대종교사학 내에서 홍익사상에 대한 인식이 깊어졌고 홍익사관이 새롭게 발아되었다.
1980년대 이후 선도사서의 등장, 중국 동북지역 고고학의 발전과 동북공정은 한국 상고·고대사 연구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그 대체적인 연구의 방향은 홍산문화를 단군조선의 선행문화 또는 배달국문화로 자리매김하는 방향이었다. 이렇듯 한국 상고·고대사가 복원되고 그 문화적 실체인 선도문화[선도제천문화]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면서 홍익주의에 대한 이해, 홍익사관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가게 되었다. 870여 년 중화사관에 밀려나 있던 선도 홍익사관이 한국사의 중심으로 제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