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해방 이후 관민 영역에서 활동한 공업계열 인사들의 산업재건 논의가 제1공화국 초기 기획처의 경제계획으로 계승되었음을 인적·사상적 연속이라는 측면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해방 직후 남한의 경제난이 심각해지면서 각계각층 인사들은 기존 경제 구조의 재편을 통한 경제자립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산업재건 노력이 관민 차원으로 이루어졌다. 관변단체인 조선산업재건협회는 「산업긴급부흥기본요강」을 통해 강력한 경제계획기관의 주도 아래 종합경제계획 입안과 중점산업 육성을 주장하였다. 민간단체인 조선공업기술연맹은 이준열, 김용암 등 공업계열 인사들이 주도하며 공업 분야의 계몽 활동에 힘썼다. 무엇보다 이들은 탈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며 합리성과 효율성에 기반한 산업 생산력 증강을 강조하였다.
관민 차원의 산업재건 노력은 정부 수립과 함께 경제계획기관 역할을 부여받은 기획처로 수렴하였다. 초대 기획처장을 맡은 이순탁은 당대 저명한 중간파 인사이자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서, 농업개혁을 중점에 둔 계획경제를 구상하였다. 이순탁은 서북 지역 출신 기독교도였던 차장 김훈과 접점을 만들지는 못하였지만, 오히려 비서실장 정현준이 이순탁의 계획경제 구상에 공감하면서 기획처의 방향성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역할을 도맡았다.
기획처의 경제계획 입안 실무를 담당하였던 경제계획국과 물동계획국, 그리고 경제계획관실은 조선공업기술연맹 출신 공업계열 인사들이 다수를 이루었다. 경제계획국장 손봉조와 경제계획국 제2과장 박남수는 기획처의 거시적 경제구상인 계획경제와 경제통제를 강조하였고, 여기에 경제계획 입안을 담당하였던 조선공업기술연맹 출신 제3과장 주리회는 공업 위주의 발전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여기에 물동계획국장 김용진 역시 조선공업기술연맹 출신으로 손봉조와 경제계획관을 겸임하며, '강권적 계획경제'의 구체적인 실행방법으로 물동계획을 제시하였다. 조선공업기술연맹 출신 공업계열 경제계획관들은 전공 분야별 전문성을 가지고 경제계획 입안에 참여하였다.
기획처의 산업재건 노력은 이순탁과 정현준의 계획경제를 전제한 경제구상 아래 '물동5개년계획'과 이를 기반으로 입안된 '산업부흥5개년계획', '산업회복5개년계획'이라는 정책으로 도출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대대적인 정치·사상 탄압으로 인해 이순탁과 정현준이 물러났고, 미국이 산업재건보다 '경제안정화' 기조를 강요하였다. 기획처는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겪으며 경제계획 입안 업무가 사실상 제거되었다. 이후 한국전쟁 중반부터 각계각층에서 전후복구 방안을 모색하였고, 동시기 서구의 근대화론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산업재건 논의가 다시 활기를 띠었다.
이처럼 해방 직후부터 공업계열 인사들에 의해 주창되었던 산업재건 논의는 기획처의 거시적인 계획경제라는 틀 안에서 경제계획이라는 구체적인 정책으로 계승되었다. 이는 곧 제1공화국 초기 국가 경제발전의 방향성이 공업 본위로 맞추어져 있었음을 의미하였다. 비록 기획처의 경제계획은 본격적인 실행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지만, 1950년대 동안 입안되었던 일련의 경제계획의 기원으로서 산업재건이라는 목적과 생산력 급증을 위한 공업 중심의 발전 의지가 꾸준히 계승되고 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