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8월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 사건은 일본 국민들만이 아니라 일본 정치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미사일이 일본열도를 넘어 태평양 해상에 낙하함으로써, 일본의 전 지역이 북한의 미사일 사정권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만든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에 의해 증폭된 對북한 위협인식을 바탕으로 일본의 정치인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오랫동안 금기시 되어 왔던 유사법제 제정 필요성에 대하여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부치 총리는 유사법제는 어디까지나 연구의 대상이며, 여론의 동향을 감안하면 법제화는 시기상조라고 하는 기존의 역대 자민당 내각의 입장을 되풀이 했다. 유사법제의 법제화는 '고도의 정치 판단'이 필요한 사안이라고 말하며, 실제로는 그와 같은 '정치 판단'을 회피한 것이다. 그만큼 유사법제의 추진은 정치인에게 있어서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노로타 호세이 방위청장관은 "연구는 충분히 했으며 법제화의 필요성이 있다."고 언급함으로써 총리의 발언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간 답변을 했다.
한편 1999년 3월의 괴선박 사건은 다시 한 번 일본의 정치인들의 對북한 위협인식을 자극하는 사건이었으며, 여러 정치인들이 북한의 위협에 대한 대처로서 유사법제를 제정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오부치 총리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으며, 오부치 총리보다 전향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던 노로타 방위청장관 역시 법제화의 시기에 관하여 특정하지 않음으로써 가까운 장래에 유사법제가 성립되는 것은 요원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2000년 4월 총리에 오른 모리 요시로 총리는 유사법제에 대해 여당의 의견을 수용한다는 입장을 취하며, '국민의 생명, 재산을 지키는 것이 정부의 사명'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유사법제를 본격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결국 북한이 행한 일련의 사건들이 촉발시킨 일본 정치인들의 對북한 위협인식의 고조와 그에 입각한 유사법제 필요성에 대한 주장이 유사법제 법제화라고 하는 오랫동안 꿈적도 하지 않던 금기의 영역을 움직인 것이다.
2001년 12월에 발생한 북한 공작선 격침사건은 일본 정치인들에게 북한에 대한 위협을 재인식시켰는데, 국회 회의록에 나타나는 주요 장관들의 대북인식을 보더라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1998년 대포동 미사일 발사를 비롯한 일련의 사건들이 일본 정치인들의 대북 위협인식을 증폭시켰고, 유사법제 필요성에 관한 논의를 활성화시켰다. 결국 여야를 막론한 유사법제 필요성에 대한 주장이 일본 정부를 움직여 유사법제의 법제화에 시동이 걸렸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한편 유사법제의 법안 심의과정에 있어서도 일본 정치인들의 對북한 위협 인식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유사법제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인 무력공격사태와 관련해서는 북한의 미사일 위협이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었다.
또한 북한의 테러행위에 대한 위협인식 역시 많은 정치인들에 의해 피력되었다. 특히 2002년 9월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 방문 이후 드러난 일본인 납치문제는 테러로 규정되며, 일본 정치인들의 對북한 위협인식의 중요한 목록중의 하나가 되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를 9.11 테러에서 민간비행기를 무기로 사용한 것에 비견하며, 북한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며 對북한 위협인식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처럼 유사법제 법안 심의의 전 과정에 걸쳐서 일본의 정치인들이 북한 미사일과 테러에 대한 위협인식을 표명하고 있는 것을 통하여, 일본의 對북한위협인식이 유사법제 성립의 가장 큰 요인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본 논문은 일본 정치인들의 對북한 위협인식이 유사법제의 성립이라고 하는 일본 안보정책의 획기적인 변화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국회 회의록이라고 하는 1차 자료를 활용하여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를 통하여 일본의 안보정책 변화에 있어서 일본 정치인들의 對북한 위협인식이 중요한 변수라고 하는 것이 분명해졌으며 향후 일본의 안보정책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도 일본 정치인들의 對북한 위협인식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