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당시 국군이 수행하였던 후방지역 작전은 6·25전쟁 중 일시적으로 수행되었거나 부가적인 작전으로 이해되어 왔다. 기존 연구는 국군의 후방지역 작전을 백야전전투사령부가 수행한 작전 위주로 설명하거나, 비정규부대가 수행한 작전으로 분석하였다. 백야전전투사령부를 중심으로 연구 된 기존 연구는 백야전전투사령부 창설 이전 수행되었던 후방지역 작전에 관한 설명이 없었다. 이 연구는 후방지역 작전을 휴전협상 시기에 일시적으로 수행되었던 것으로 설명하였다. 또 다른 연구는 비정규부대를 중심으로 후방지역 작전을 분석하였다. 이러한 분석은 비정규부대가 중심이 되어 후방지역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즉, 이러한 기존 연구로는 국군이 6·25전쟁 당시 수행하였던 후방지역 작전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기존 인식과 달리 후방지역 작전은 후방지역 작전을 전담하는 정규군이 창설되어 6·25전쟁 동안 지속적으로 수행되었다. 후방지역 작전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의 정규군에 의해 수행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은 전 전선에서 전면적인 후퇴를 시작하였다. 북한군의 갑작스러운 후퇴로 미처 후퇴하지 못한 패잔병들은 그대로 남한지역에 남아있었다. 패잔병들은 남한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격대에 합류를 하였다. 김일성은 남한 내 지방당원들이 유격대에 합류 할 것을 지시함과 동시에 게릴라 활동을 준비시켰다.
유격대, 패잔병, 좌익세력 등으로 구성된 게릴라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험준한 산악지대에 근거를 두고 호남지역에서 보급로 차단, 식량약탈, 관공서습격, 통신망 절단, 살인, 납치 등의 행위를 자행하였다. 게릴라들의 활동으로 후방지역의 질서는 극도로 교란되었고, 지역 내 치안이 확보되지 못하였다. 게릴라들의 활동으로 민심이 동요되고 국민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국군은 후방지역에서 게릴라들의 활동으로 전선지역에서 수행 중인 작전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육군본부는 게릴라들의 활동이 국군의 전쟁 수행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자, 후방지역에서 게릴라 토벌 등 작전을 담당할 정규 부대를 창설하고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계획하였다. 육군본부는 1950년 10월 16일에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지역작전을 전담할 제3군단을 창설하였다. 육군본부는 제3군단에 후방지역에서 주요 보급로를 확보하고, 담당지구 내 적을 격멸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후방지역에서 게릴라를 토벌하는 작전은 제3군단을 시작으로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백야전전투사령부까지 끊임없이 수행되었다. 당시 육군본부는 전황에 따라 후방지역 작전을 담당하는 부대를 바꾸었지만, 후방지역 안정, 치안유지, 보급로 확보 등 작전 목표는 바뀌지 않고 유지되었다. 또한 육군본부는 후방지역 작전 전담 부대에 공병부대를 배속하는 등 후방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본 연구는 제2장에서 국군이 후방지역 작전을 수행하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을 하였고, 제3장, 제4장에서 제3군단, 백야전전투사령부의 후방지역 작전을 설명하였다. 즉, 본 연구는 후방지역 작전을 수행한 제3군단 창설 시부터 휴전협상 당시 후방지역작전을 수행한 백야전전투사령부까지 수행한 작전을 연속적으로 설명하였다.
이를 통해 본 연구는 후방지역 작전이 반격작전기부터 휴전협상으로 전선이 고착되는 시기까지 끊임없이 수행되었음을 밝혔다. 연구는 후방지역 작전을 담당하는 부대가 제3군단에서 백야전전투사령부까지 전황에 따라 바뀌지만, 후방지역 작전의 목표, 작전 수행 자체는 변하지 않았음에 주목하였다. 이러한 연속성은 국군이 후방지역에서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제3군단이 후방지역 작전을 수행하면서 나타난 과오를 분석하여, 백야전전투사령부는 제3군단이 범했던 과오를 범하지 않고 완성도가 높은 작전을 수행하였다. 즉, 본 연구는 기존연구가 가지는 한계를 보완하여 국군이 수행한 후방지역 작전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