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해외기지는 그동안 미국 국가전략의 '중심'을 드러내 왔다. 중국과의 전략경쟁을 선포한 이후 미국은 가장 먼저 '해외 주둔 전력 재배치'를 검토하고 있다. 이에 따라 아시아의 동맹국들도 미국의 해외기지에 관한 나름의 전략적 구상을 하고 있다. 오늘날의 전략환경에서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연구는 중요한 함의를 제공한다. 미국의 해외기지 결정 과정에서 주둔국과 주최국의 고민을 함께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미국이 국내·외의 반대에 따라 유럽에 군사력을 주둔시키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유럽 대륙 내까지 지상군을 포함한 대규모 군사력을 배치하게 된 과정을 분석하는 데 목적을 둔다.
본 연구는 미국 해외기지의 '유럽 진출 과정'에 초점을 두기 위해 기존의 기지 유형을 차용하지 않고, '주변 기지', '임시 주둔 기지', '직접 주둔 기지' 등 새로운 기지 유형을 통해 분석한다. 연구의 독립변수는 '미국의 유럽 주둔 필요성 판단(X/△/○)'과 '유럽의 미군 주둔 허용(X/△/○)'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독립변수의 조합은 총 아홉 가지 경우의 수로 나타나며, 이는 종속변수인 '해외 주둔기지의 유형'으로 도출된다.
1938년부터 1941년까지 미국은 추축국 위협의 증대 및 고립주의의 위기를 겪으며 '반구 방어'를 글로벌 방위태세로 채택했다. 이는 본토에 한정됐던 미국의 방위 영역을 대서양과 태평양 일부까지 확장한 것이지만, 아직 미국이 해외에 군사력을 투사할 필요성을 인식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 전선에서 미국의 도움 없이 세계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즉, 이 시기에는 미국과 유럽 양측의 '유럽 주둔 불필요' 판단에 따라 미국의 해외기지는 '주변 기지'로 나타난다. 미국은 영국, 프랑스가 소유한 태평양과 대서양의 섬을 중심으로 '주변 기지'를 구축했다.
1942년부터 1950년까지 미국은 '종심 상 주변 방어'태세를 중심으로 유럽 주변까지만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소련의 위협을 '정치적' 차원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전후 동원해제와 함께 미국은 파병된 병력을 철수하기 시작했으며, 일부 병력만 '임시 주둔'의 형태로 배치되어 독일 점령 등 최소한의 임무만을 수행했다. 한편, 유럽은 정치·경제·사회적 차원의 논의를 통해 미국의 '임시 주둔'을 인정하는 협정을 맺었다. 이 과정에서 유럽 각 국가는 주권, 사회적 반대, 경제적 지원 필요성 등의 측면에서 각기 다른 입장을 보이며 미국의 기지 및 주둔에 관한 협상을 진행했다.
19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과 유럽은 소련의 위협이 '군사적 위협'임을 실감했다. 양측은 미국의 군사력이 유럽 대륙에 '직접 주둔'할 필요성에 공감했다. 이에 미국은 '종심 상 강화된 방어'를 글로벌 방위태세로 채택하면서 적극적으로 군사력을 투사하기 시작했다. 또한, NATO의 전략개념으로 '전진 방어'를 정립하면서 NATO의 군사화가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NATO의 지상전력에 가담하기 위해 독일의 재무장이 논의됐다. 1955년에 독일이 주권국가로 인정받고 NATO에 가입함으로써 강력한 '주둔형 동맹'이 완성됐다.
결국, '위협'은 모든 요인을 압도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요인이 미국 해외기지의 유럽 진출을 반대했지만, 소련과의 '전쟁 위협'은 강력한 군사력이야말로 국가전략을 뒷받침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확실한 수단임을 깨닫게 했다. 오늘날 한국은 어떠한 위협에 대비하고 있는가? 또, 미국이 한반도 주둔을 통해 억제할 위협은 무엇인가? 둘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양국의 전략적 계산도 달라야 하며, 한국은 미국의 전략적 계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국만의 계산을 해야 할 것이다.
본 연구는 미국의 군사력이 유럽 대륙에 진출하는 과정을 '기지의 유형'을 통해 분석했다. 이를 통해 몇 가지 학문적 의의를 도출할 수 있다. 우선, 미국 해외기지의 유럽 진출 과정을 기지 유형의 변화를 통해 제시함으로써 가시적인 분석이 가능했다. 또, 해외기지의 진출 과정을 미국의 판단뿐만 아니라 유럽의 입장을 함께 고려함으로써 해외기지 주둔이 강대국의 일방적인 결정이 아닌 양측의 합의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