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에서는 17세기 조선과 프랑스 왕실의 후궁(後宮)과 '책봉정부(情婦)' 였던 희빈 장씨(禧嬪 張氏)와 몽테스팡 부인(Madame de Montespan)의 생애를 집중적으로 고찰하면서 두 나라 왕실 여성의 삶을 비교해 보았다.
희빈 장씨와 몽테스팡 부인은 각각 한국과 프랑스의 연구자뿐 아니라 대중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두 여성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어떤 영향력이 있었는지에 대한 논의는 많지 않다. 조선사나 프랑스사 또는 여성사 연구를 보면 두 인물을 다룬 내용이 있긴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희빈 장씨에 대한 연구가 없고, 한국에서는 몽테스팡 부인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다. 나아가 이 두 여성을 비교하거나, 둘의 생애를 출생부터 죽음까지 다룬 논문은 없다. 이에 조선과 프랑스 왕실의 두 여성의 삶을 비교하여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살펴보았다.
17세기 조선과 프랑스는 서로 다른 정치·사회적 배경을 지녔다. 이 시기에 양국의 통치자는 모두 강력한 왕권강화를 꾀했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문화적·경제적 변화 양상을 보였다. 국정 변화를 겪는 와중에 왕실 여성들은 국가 운영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들 왕실 여성들 중에 희빈 장씨와 몽테스팡 부인이 있었다.
본문에서는 먼저, 왕실 여성 범주 안에 후궁과 책봉정부라는 품계와 명칭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봤다. 조선에서는 후궁제도를 통해 후궁의 품계와 명칭을 합법화했던 반면, 프랑스에서는 왕의 정부들이 있었지만, 루이 14세 시기에 와서 책봉정부라는 작위와 명칭이 만들어졌다. 후궁과 책봉정부가 합법화된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희빈 장씨와 몽테스팡 부인 둘 다 왕의 선택을 받은 여인이자, 다른 왕실 여성들과 달리 자기가 맡은 임무 이외에도 새로운 활동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처음에는 궁녀, 시녀의 신분으로 입궁했으나, 이후 승진 과정은 매우 특별하였다. 희빈 장씨는 1680년(숙종 6)에 궁녀로 입궁했고, 몽테스팡 부인은 1661년에 시녀로 입궁했다. 둘의 가문은 정치세력의 후원을 받거나 막강한 정치세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왕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입궁하는 것은 쉬웠다. 입궁한 목적은 달랐지만, 결국, 둘 다 왕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왕의 총애가 더 깊어지자 희빈 장씨는 1686년(숙종 12)에 후궁 자리에, 몽테스팡 부인은 1674년에 책봉정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 두 여성은 왕의 곁에 있으면서 왕권 강화의 핵심적 역할을 했고, 한 나라의 역사에서 주요한 인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두 여성은 조선사와 프랑스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특히, 희빈 장씨는 조선 시대를 통틀어서 궁녀로 시작해 중전 자리까지 올랐다가 다시 후궁으로 강등됐던 유일한 인물이자, 왕(경종)의 어머니였다. 몽테스팡 부인은 기혼자로서 왕의 정부가 되어 책봉된 다음 왕실의 안주인과 같은 지위를 가졌고, 실질적으로 왕비는 되지 못했으나, 왕비 못지않은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또한, 그녀는 왕의 자녀를 낳아서 그 5대 후손이 왕이 되기도 했다. 두 여성 모두 왕의 통치에 영향을 줬을 뿐 아니라, 가문·정치세력·왕실 여성 등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일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두 여성이 받았던 대우와 안타까운 죽음까지도 특별한 형상이 있다. 두 여성이 높은 자리까지 오른 과정과 궁녀(시녀) 시절부터 왕비가 되거나 왕비와 비슷한 지위가 되어 왕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는 점은 비슷하다. 다른 왕실 여성들보다 왕의 총애를 더 많이 받았고, 다양한 방면에서 더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희빈 장씨와 몽테스팡 부인은 결국 왕에게 버림을 받고 죽었다. 장씨는 사약을 받고 죽었고, 몽테스팡 부인은 수녀원에 들어가 혼자 쓸쓸히 죽었다. 두 여성은 각각 다른 역사적 상황 속에서 왕실 여성으로 큰 역사적 의미를 남겼지만, 결국 여성으로서 왕의 첩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벗어나기는 매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