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국제정치에서 발생하는 국가 간 갈등은 물리적 이익뿐만 아니라 민족, 종교, 가치나 신념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적 요인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물리적으로 측정가능한 권력이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며 발생하는 국가 간 갈등은 외교적 노력을 통해 협상과 타협이 가능 하지만, 관념적 요인, 특히 집단 기억이나 감정에 의해 발생하는 국가 간 갈등은 타협이나 협상이 어렵고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관념적 요인에 의한 국가 간 갈등의 해결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국가 행위자는 논리적인 일관성이 결여되고 비합리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둘째, 국제정치에서는 인간 행위자의 특성이 그대로 투영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기억과 감정을 가진 인간은 부당함에 맞서기 위해 행동하기도 하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의 연계성이 더욱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침략과 지배라는 역사적 경험을 가진 국가 간의 관계에서는 가해국과 피해국이라는 각자의 정체성이 합리적인 선택과 판단에 기초한 외교 정책 결정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한일 관계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양국은 상대의 정체성에 관해 경험적으로 굳어져 온 관념에 따라 역사 인식에서 차이를 노정해 왔고, 그로 인해 지속적인 갈등을 겪고 있다.
그러나 한일 간의 갈등이 더욱 심화하였던 시기는 문재인 정부 시기였다. 과거사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었던 문재인 정부는 집권 이후 전임 박근혜 정부와 일본의 아베 내각 사이에서 이루어진 2015년 12월의 한일 '위안부' 합의를 재검토하였다. 임기 2년 차인 2018년 10월에는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한국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자, 이에 반발한 일본이 2019년 7월 반도체 핵심 소재 품목들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로 한국에 경제 제재라는 보복을 가하는 일도 있었다.
이 시기 한일 양국은 대화를 통한 타협 대신 상대국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기 위해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외교적 수단을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는 당시의 한일 갈등을 통해 무엇을 얻었을까? 국가와 민족의 자존심을 걸고 일본에 맞선 것이 과연 국익을 위한 것이었을까?
본 연구는 특수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 국가 간 관계에 국내정치적 요인이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연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한일 갈등의 역사를 되짚어봄으로써 문재인 정부가 일본과 갈등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살펴보고, 특수한 역사적 경험에 비롯된 공동체의 집단 기억과 감정을 고려하는 구성주의 시각을 적용하여 한일 양국 간 과거사로 인한 한국인 피해자 문제를 고찰하였다.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의 연계성을 따져보기 위해서는 대외정책 결정 요인의 이론적 배경으로 양면게임 이론을 적용하였다.
사례 연구로는 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 그리고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 이후 일본의 경제 제재로 인한 무역 분쟁, 이렇게 세 가지 갈등 사례를 분석하였다. 분석 자료로는 여론조사, 대통령 지지도와 한일 갈등 지수에 대한 시계열 자료, 정치적 연설이나 선언, 외교문서, 담화문, 저작물, 항의, 언론 기사를 비롯한 정치인 언행 표출 자료 및 정치적 이벤트 등과 관련된 자료를 활용하였다.
한일 갈등이 높았던 시점에 한일 관계 이슈에 있어 한국 정부의 정책들이나 고위 관료의 언행이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 자료들을 활용하여 내용분석을 하고자 하였으며, 한국 정부의 정치외교적 행위가 대통령 지지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추세변화를 통한 상관관계도 살펴보았다. 사례 분석의 결과, 국내 정치권력이 선택적으로 재구성된 집단 기억을 활용하여 한일 간의 기억과 감정의 갈등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는지에 관해서는 정부의 정치외교적 행위가 발생하는 시점과 한일 갈등의 시점이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였고, 한일 갈등의 고조가 대통령 직무 수행 긍정률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 미뤄볼 때 희생자 혹은 피해자의 기억에 기반한 국제 갈등은 그를 통해 이익을 얻는 국내 정치집단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성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양면게임 이론의 측면에서 보면, 한일 갈등 시기 한국과 일본 정부의 입장 차이는 갈등 해소를 위한 잠재적 합의의 영역을 매우 좁혔고, 양국 모두 국내 여론을 우호적으로 조성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여 윈셋의 크기가 작았으며, 이로 인해 양국의 갈등 해소나 타협을 이룰 조건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집권 후반기에 한일 갈등에서 벗어나 관계 개선을 시도하려 할 때 국내 우호여론 형성에 실패하여 갈등 상황을 벗어나기 어렵게 만든 주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