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20세기 초 영제국 식민지 출생 작가 엘리자베스 보웬(Elizabeth Bowen, 1899~1973)과 진 리스(Jean Rhys, 1890~1979)의 전간기(Interwar period, 1918~1939) 작품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기획(nationalist projects) 또는 국가 담론에서 어떻게 여성이 배제되는지에 주목하여, 국가적·민족적·젠더적으로 방황하는 여성주체의 "경합 정체성"(Contesting Identities)을 분석한다. 이 작업은 "민족주의 기획은 '민족국가'와 극명하게 구분"되며 "민족의 경계가 실제로 소위 '민족국가'들의 경계들과 결코 일치하지 않다"(유발-데이비스 19)는 전제에서 출발, 민족주의 기획의 한계를 확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보웬은 아일랜드 더블린(Dublin) 태생의 영국계 아일랜드인(Anglo-Irish), 리스는 도미니카 태생의 영국계 크레올(Creole)로서 런던과 파리를 배경으로 활동하였다. 작품에는 식민지 정착민 태생으로서 식민지배자이자 동시에 메트로폴리스에서 이방인의 위치를 점거하는 개인이 민족주의 기획 사이에서 문화적 혼란과 방황, 상실감을 경험하는 모습이 공통적으로 그려진다. 그 가운데 민족적 동일화의 동력에 더하여 호명되는 여성성으로 인해 이들의 정체성은 더욱 분열된다.
본고는 민족주의 기획이 적극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역사적 분기점으로서 20세기 초 전간기에 주목한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독특한 사회적 위치와 정체성의 혼란을 설명하기 위해 본고는 바바(Homi Bhabha)의 이론을 활용,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아일랜드와 도미니카, 그리고 메트로폴리스 런던과 파리를 양가성(ambivalence)과 혼종성(hybridity)이 출현하는 틈새(interstices), 즉 사이-공간(in-between space)으로 해석한다. 본고는 주체의 위치에 따라 새롭게 출현 또는 소멸, 재배열되는 복수(複數)의 정체성들이 내재적인 모순을 발생시키는 미결정의 기획으로서의 정체성, 즉 "경합 정체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다.
본론에서는 보웬의 『마지막 9월』(The Last September, 1929)과 『한낮의 열기』(The Heat of the Day, 1948), 리스의 『어둠 속의 항해』(Voyage in the Dark, 1934)와 『한밤이여, 안녕』(Good Morning, Midnight, 1939)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 9월』과 『어둠 속의 항해』는 작품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방황의 모티브를 재현함으로써 둘의 독특한 사회문화적 위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한낮의 열기』와 『한밤이여, 안녕』은 1930년대 민족적 우월성을 근거로 하여 제국주의적 팽창주의와 파시즘이 도래하고 있던 전간기의 런던과 파리를 배경으로 삼는다. 두 작품은 메트로폴리스로의 이주 이후의 경험을 다룸으로써 정체성이 무엇인지 밝히길 요구하는 구체적 갈등 상황 속 여성 주체의 혼란이 그려진다. 이 작업은 경합하는 다양한 특질을 긍정하고 언제나 과정 중에 있는 기획으로서, 기존의 국가, 민족, 젠더 정체성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새로운 정체성을 정초하는 개인의 의식에 주목한다.
이 연구는 작가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려거나 둘의 국가정체성을 규명하려는 시도보다 국가, 민족, 젠더의 문제가 경합하고 길항하는 사이-공간에서 여성이 경험하는 다양한 층위를 살펴보는 것에 목적이 있다. 민족주의 기획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본고의 문제의식은 자국민중심주의라는 '장벽'을 자처하며 민족주의가 재호출되는 21세기 우리 시대에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기존의 민족주의 논의에서 배제되어 온 여성의 경험을 재고함으로써 국가공동체에 관한 상상력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