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박목월의 시세계에 나타난 색채 이미지를 통해 정서를 탐구함으로써 그동안 동양적 여백미와 절제미, 순수미 등으로만 해석되어 온 시인의 미학적 다양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시인의 삶과 정서적 변화는 그의 시세계에서 풍부한 색채 이미지로 표상되는데, 이러한 색채 이미지는 시각에만 머물지 않고 청각, 촉각 등의 감각 이미지와 연결되면서 내면의 복합적인 정서를 드러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를 위해 예술 작품에 드러난 색채의 의미를 밝힌 칸딘스키, 인문학적 관점에서 색채를 고찰한 미셸 파스투로, 색채의 대중성 및 보편성을 탐구한 에바 헬러의 저술들을 참고하고자 한다. 이외에도 박목월 시의 색채 이미지와 정서의 상관성을 발견하기 위해 다양한 색채 이론들을 경유한다.
제2장에서는 박목월의 초기시에 구현된 이상향의 색채 이미지에 주목한다. 그의 초기시에서 이상향은 주로 청색 계열의 자연물로 표상되며, 시인은 자아의 심혼에 스스로 도취하는 모습을 보인다. 박목월은 일제강점기라는 암흑의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산'의 자연적 세계를 청색, 백색, 보라색 등의 다채로운 색채 이미지로 묘사하여 평온함을 얻고자 한다. 초기시에 나타난 화자는 청각과 후각 등 다른 감각을 동원하여 이 상향에 대한 시각적 거리감을 무화(無化)시키고, 나아가 신비로운 청색의 세계에 온몸을 맡기는 독취(獨醉)를 드러낸다. 하지만 시인은 순결하고 담백한 세계와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발견함으로써 좌절하는 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제2장 1절에서는 검은색으로 표상된 일제 말기의 상황과, 신성으로 물든 달빛으로 이상향을 희구하는 화자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박목월은 일제 말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밤과 암흑으로 표상한다. 그런데 밤은 또한 꿈을 꾸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이상향을 형상화하는 시간으로 볼 수도 있다. 시인은 현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달빛에 함축된 신성으로 자아를 위로한다. 제2절에서는 접근할 수 없는 이상향에 대한 좌절감과, 청색 동물의 환상성에 의탁하여 담박함과 순결을 추구하려는 모습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상향인 '산'은 주로 청신하고 담박한 원경(遠景)으로 제시되며,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구불구불하고 비좁다. 화자는 청각과 후각으로 이러한 거리감을 해소하게 된다. 제3절에서는 분홍색과 보라색을 통해 청색으로 형상화된 이상향에 아늑함과 생기를 더하고 자아의 외로움을 완화하려는 시인의 내면을 읽어내고자 한다. 시인이 이상향에 몸을 두고 청정함과 담박함뿐만 아니라 온화함과 생기도 같이 존재함을 발견한다. 이것은 이상향으로 향하는 좌절감과 외로움을 위로해준다.
제3장에서는 다채로운 이상세계에서 무채색의 현실세계로 돌아오며 현실 체험을 통해 실감한 슬픔과 고독감 등 우울함의 정서를 밝히고자 한다. 박목월은 자신의 자서전 『밤에 쓴 인생론』에서 초기시와 달리 중기시는 한국전쟁과 4·19혁명을 거치면서 현실체험이 두드러지게 되었다고 서술한 바 있다. 초기시에서는 상상을 통해 자아의 마음에서 끌어낸 정서가 자아의 감각에 집중한 것과 달리 중기시에서는 시인이 주변의 사람이나 사건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절실하게 경험한 것을 보여준다.
제3장 1절에서는 초기시에 다채로운 색채 이미지로 나타났던 청량한 산수(山水)의 자연공간이 잿빛 폐허의 무게와 압박감으로 치환된다. 이에 따라 백색의 맑음과 순수함도 잿더미로 변한 세계를 망각하기 위해 덮음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눈(雪)'으로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로 중년 시기는 박목월이 제일 외로움과 경제적인 곤란에 빠진 시기이다. 「효자동」은 독거의 외로움과 불안정함을 보여주고, 「가정」은 가장으로서 생계를 위해 겪은 경제적이고 심리적인 난처함을 진술하며, 「방문」은 사랑의 끝을 기록하고, 「하관」과 「후일음」은 가족의 죽음을 읊는다. 이처럼 불가항력적인 사건들은 시인에게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2절에는 폐허와 눈으로 가려지는 현실세계의 배경에 실존의 체험을 더함으로써 배가되는 생활의 고난과 창량(蒼涼)을 통해 존재를 더욱 증명하려고 하는 시인의 모습을 찾고자 한다. 나아가 이들 시련을 통해 시인은 인생의 소멸, 즉 죽음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3절에서는 보랏빛 안개의 번짐과 소멸로 이러한 생의 허무함과 죽음의 운명을 형상화하는 실존의식을 조망하고자 한다.
제4장에서는 박목월이 생애 말년에 기독교 장로가 되면서 초월적 세계를 지향하는 구도인으로서의 모습을 다루고자 한다. 시인은 신의 시각(視角)과 은총을 고백한다. 생활의 고난과 시련을 겪은 시인은 망각을 표상하는 흰색의 눈(雪) 속에 묻힌 사물의 본질을 찾기 시작한다. 이들 사물은 정서를 토로하거나 자극하는 도구가 아니고 사람과 같은 독립적인 존재이다. 이리하여 시인이 바라보는 사물이나 세계의 색채는 이상세계에 주관적으로 부여한 다채함이나 현실세계의 마멸을 표상하는 무채색도 아니라 신의 은총이 내려준 본연(本然)의 '순색(純色)'이다.
이처럼 4장 1절에서는 '순색'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개안(開眼)'의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박목월의 후기시에 나타나는 '순색'은 '나'라는 주체가 주관적으로 부여하는 색채가 아니라, 신에 의해 각 사물들에게 주어지는 본연의 색채이다. '개안'은 이러한 순색을 발견할 수 있는 순간이면서 동시에 신과의 조우를 의미한다. 2절에서는 이러한 '개안'과 호응하여 '순금열쇠'와 '금빛 수실'의 광휘로 표상하는 초월세계와의 연결을 밝히고자 한다. 3절에서는 신의 따뜻한 은총과 보살핌으로 정화된 낙원의 세계가 초록빛의 '에덴'으로 나타나며 공존과 박애를 깨닫는 달관한 정서를 다루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