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송의 '지속 철학'은 등장과 동시에 기독교계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가 말하는 지속의 철학이 신의 원대한 목적지에 대한 도달 가능성을 부정하고, 또 신의 전지전능에 대해서 실재와 현실 사이의 모순율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이 과학이 고정된 관점으로 세계를 보는 것을 비판하듯, 신학 또한 베르그송에게 있어서는 지금의 그 자리를 지키는 것에 만족한다면, 과학과 같은 선상에서 비판을 받게 될 것이며, 또 신학이 과학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채로 고정된 학문체계에 머문다면 시간의 흐름 그 자체인 지속의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될 것이다. 이점에서 과학은 자신의 오류를 거침없이 수정한다는 점에서는 신학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흐름과 상관없이 형이상학적인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기독교는 베르그송 철학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하나의 종교로 치부되지 않는다. 베르그송은 기독교 신비주의를 다른 모든 종교들의 신비주의들 중 가장 진정한 의미의 신비주의로 여긴다. 그가 기독교계에게서 반기독교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기독교 신비주의를 진정한 의미의 신비주의라 말한 까닭은, 기독교 신비주의가 지속의 흐름을 직관하면서 개인적인 신비주의로 연결되는 단편적인 신비체험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닌, 지속의 원동력을 인류 전체를 향하게 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신을 직관함과 동시에, 그 신이 신비가들과 이스라엘 신비가들을 통해 인류 전체에게 전해졌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 여부와는 달리 그 누구도 산상 수훈에서 드러난 그의 사랑의 선포를 비난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말에서 그리스도가 지속 속에 있는 신의 사랑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는 베르그송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이런 베르그송의 철학은 지각적이고 경험적이며 동시에 실천적이다. 역동적이며 실천적인 종교로써의 기독교는 규정된 율법들을 허물고 유동적인 지속의 흐름에 참여해 진정한 신비주의의 원천으로서 활동할 것을 베르그송 철학에게 요구받는다. 이를 위한 지속의 참여에 대한 이해의 기반을 베르그송의 사상을 중점으로 마련하기 위해서 필자는 그의 사상을 정리하면서 현 시대에 종교가 가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려 한다. 현대시대의 과학과 형이상학의 대립 속에서 과학 그 자체가 지닌 한계와 형이상학의 잘못된 방향성을 다루며 그들이 각각의 위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룰 것이다. 형이상학 그리고, 신학과 같이 단순히 사변적인 시선으로 처리되었던 논의들이 다시금 제대로 논의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형이상학과 신학이 사장되어야 하는 학문이 아닌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객관적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다룰 것이다. 과학적인 지성의 시선들이 고정된 시간관을 사용해 어떻게 인간의 자유를 억누르는지, 그리고 공간 자체를 결정화 시켜 세계를 불가분한 계기들의 집합으로 여기면서, 각 계기의 연속되는 지속을 배제시킴으로 생기는 정신과 물질의 모순율을 다루면서, 인간의 자아가 인식하는 표층자아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차이와 강도 속에서 이해되는 지속 영역의 심층자아가 있다는 것을 다루며, 인간의 자아가 고정된 형태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심층자아의 자리에서 외부세계에 대한 지속에 참여하므로 생성적인 차원에서 진정한 의미로서의 자아가 있다는 것을 말할 것이다.
이어 진화적 계기들과 진화론의 영역을 다루면서 진화의 과정이 각각의 분절이 아니라 근원부터 시작된 생의 약동이 시간을 흐름을 포함해 지금까지도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다루며, 세계는 개별 계기들의 단순한 집합이 아닌 약동에 의해서 움직여가는 하나의 유기체와 같다는 것을 말하면서, 개체 생명체들이 창조와 생성의 이완 작용 사이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점유할 수 있다는 것을 다루고, 생명성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생의 약동으로서의 지속을 다룰 것이다. 이 지속의 내용을 확인함으로, 우리는 진화의 과정이 단순한 우연성이나 어떤 목적론적인 것을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발성과 생의 약동으로 인한 생명성의 전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유기적인 도구를 사용하는 본능적인 진화와 물질적인 도구의 제작과 유기적 형태의 종교와 사회를 제작 가능한 인간 특유의 제작인을 다룸으로 앞에서 닫힌 종교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지성의 도구적인 종교를 말한다는 것을 다룰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신의 타협 즉, 지성과 본능의 타협 속에서 생겨나는 사회와 종교 또한 개미들이 군집을 이루는 사회를 갖고, 동물들이 무리를 짓는 사회 체계를 가진 것처럼, 인간의 사회 또한 하나의 유기체와 같이 기능하며, 그것이 도구적인 닫힌 종교와 지속적인 열린 종교로서의 기능적인 목적을 지녔다는 것을 다룰 것이다. 정신과 물질의 상승, 하강 운동 속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그 중심을 직관으로서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사회는 정적임과 동시에 열린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으며 그 선택권이 자유로써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말함으로, 인간 개별체들이 사회 속으로 참여하는 것이 곧 지속에 참여함이며, 각자의 계기들이 생성된다는 것이 직접적으로 지속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고 지속에 동참하는 것을 요구받는 다는 것을 확인할 것이다. 이로써 복음서에서 말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구절이 의미하는 것이 곧, 개인의 자아와 인류 전체를 향하는 신의 사랑을 전파하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며, 우리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들 사이에서의 조율자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것과 인류의 미래가 인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 그리고, 생명성의 유지라는 지속의 목적을 사랑의 신과의 합일로써 직관하고, 달성할 수 있는 운명이 우리의 손에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형이상학과 과학의 사이에서 지속을 대입함으로 우리 자아의 자유의지와 과학 시대에서의 종교적인 활동의 유의미함의 기반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