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과 동학농민혁명 시기 공주전투는 한편으로는 조선 후기 민중운동을 계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동학의 사상적, 조직적 영향력 아래에서 전개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동학사상이 동학농민혁명 및 공주전투에 미친 사상적, 조직적 영향력과 동학농민혁명 및 청일전쟁 관련하에 전개된 22일간의 공주전투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선 공주전투 관련 선행연구와 사료를 검토하였고, 현장 답사와 구전 자료를 통해 연구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공주전투 연구를 통해 공주전투에서 일어난 남접과 북접 농민군 및 지역 농민군의 투쟁과 이에 대응했던 조일진압군의 진압 활동을 포함한 공주전투의 전모를 규명하고자 하였고, 그동안 학계에서 낮게 평가되어 온 공주전투에 참전한 농민군 인원 그리고 공주전투에서 학살된 농민군에 대한 실상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1860년 최제우의 동학 창도와 최시형의 포교에 의한 동학의 발전 과정에서 정립된 시천주(侍天主), 보국안민(輔國安民), 후천개벽(後天開闢), 척왜양(斥倭洋)·반침략(反侵略)의 민족자주사상의 성격을 지닌 동학사상은 동학농민혁명과 공주전투에 사상적, 조직적 영향력을 끼쳤다. 공주에서는 1880년 초부터 최시형의 공주 포교와 공주접주 윤상오의 활동이 계속 이어져 1891년에는 공주가 전국적 동학 포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또한 1892년에는 교조신원운동이 공주에서 시작되었다. 삼례, 서울, 보은·금구로 이어지며 6개월여 계속된 교조신원운동은 수탈 금지와 척왜양의 요구를 내걸었고, 이는 민중들의 민심을 결집시켜 다음 해 동학농민혁명의 농민봉기로 계승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시기 공주전투에서 활동한 공주지역 농민군으로는 동학접주이며 공주 유생의병장인 이유상, 공주접주 장준환과 임기준, 유성에서 일어난 최명기 등이 활동하였고, 이들은 남북접 농민군의 공주진출에 호응하여 동학교도의 이름으로 공주전투에 참전하였다.
동학농민혁명과 공주전투의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다. 동학농민혁명은 고난에 찬 한국 근대 반외세·반봉건 투쟁의 기나긴 역사의 시작이었다. 시기적으로는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농민봉기를 시작으로 1895년 3월까지 계속된 황해도 지역 농민봉기까지 또한 지역적으로는 평양 이남의 전국에서 즉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등에서 전개된 농민봉기였다.
조선의 식민 지배에 이해를 함께하고 있던 청·일 양국은 농민군의 봉기를 빌미로 조선에 군대를 출병시켰고,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은 조선 왕궁 점령(6월 21일)과 친일개화파정부를 수립했고 연이어 청일전쟁(6월 23일)을 도발했다. 일본군의 조선 왕궁 점령으로 메이지 정부가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농민군은 조선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반외세 투쟁의 중추 세력으로 나섰다.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 대본영(청일전쟁 지휘부)은 동학농민군 진압전담부대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後備步兵獨立第十九大隊)' 등 일본군 4천~5천명을 농민군 진압에 투입하였고, '동학농민군을 모조리 살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농민군 진압에 투입된 일본군 후비19대대는 조선군의 군사지휘권을 장악하고 조선군을 동원하면서 조선 각지에서 농민군을 학살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전국에서 모인 남접 농민군과 북접 농민군 등 많은 농민군이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공주로 집결하였다. 공주전투에 참전한 농민군 대열은 동학농민혁명 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군 세력이었다. 공주를 포위한 농민군은 공주를 먼저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 후비19대대의 서로분진대 본대(약 150명)와 경군(약 800명) 그리고 지방 관군을 상대로 공주를 탈환하기 위한 전투를 벌였다.
22일간의 공주전투 개요는 다음과 같다. 22일간의 공주전투(10월 22일~11월 14일)는 제1차 대치(10월 22일), 제1차 전투(10월 23일~25일), 제2차 대치(10월 26일~11월 7일, 11일간), 제2차 전투(11월 8일~9일), 제3차 대치(11월 10일~14일, 5일간)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에는 9차례의 개별적인 처절한 전투, 대치 중 2차례의 농민군 피습 사건(10월 26일 효포孝浦 사건, 11월 11일 중대中垈·우와리牛臥里 사건), 1차례의 유구(維鳩) 농민군에 대한 침탈 사건(11월 11일)이 있었다.
10월 22일, 남접의 전봉준 농민군과 공주지역 이유상 농민군이 공주의 남쪽 이인(利仁)·남월(南月)을 함락하면서 동학농민혁명의 공주전투가 시작되었다. 10월 22일, 공주바깥산줄기(조일진압군이 충청감영의 방어선으로 삼았던 공주 시가지 외곽을 둘러싼 병풍처럼 솟은 산줄기)를 대치선으로 충청감영을 방어하는 조일진압군과 이 산줄기를 포위·공격하는 농민군 사이에 공주전투 제1차 대치가 시작되었다.
제1차 공주전투(10월 23일~25일)는 10월 23일 이인전투로 시작되어, 10월 24일부터 10월 25일까지 효포전투로 계속되었고, 대교전투(10월 24일)와 옥녀봉전투(10월 25일)가 연이어 일어났다. 10월 23일 이인전투는 일본군 스즈끼 소위 부대, 경리청(經理廳)의 성하영 부대, 충청감영군이 이인을 탈환하기 위해, 이인을 먼저 점거하고 있던 농민군을 공격하여 하루 종일 계속되었고, 저녁 무렵 조일진압군이 충청감영으로 퇴각하면서 종결되었다. 10월 23일 공주 남쪽에서 이인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을 때, 공주 시가지 동쪽 외곽 대교(大橋)와 신소(莘沼)에 북접 농민군 수만 명이 새롭게 밀고 들어와 남접 농민군과 연대하며 충청감영 포위를 시작하였다.
효포전투(10월 24일~25일)는 공주바깥산줄기 동쪽 편 효포 인근에서, 10월 24일 낮시간 하루 종일 그리고 10월 25일은 오전 6시부터 오후 1시까지, 이틀에 걸쳐 진행되었다. 효포전투는 농민군의 공격으로 조일진압군이 능티 방면 공주바깥산줄기를 방어한 전투였다. 10월 24일 효포전투에서는 전봉준·이유상·김기창이 지휘하는 농민군과 경군 경리청 성하영·백낙완 부대가 격돌하였다. 이인 전투에 참전했던 스즈끼 소위 부대는 이날 새벽에 용산(龍山) 본대로 귀환하기 위해 공주를 떠났기 때문에 이날 전투에 참전한 일본군은 없었다.
10월 24일 효포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 때, 공주 동쪽 외곽 대교에서는 경군 경리청 홍운섭 부대가 북접 농민군을 습격하여 대교전투가 일어났다. 이날 황혼 무렵 일본군 후비19대대의 서로분진대 본대, 경군 선봉진(先鋒陣) 이규태 부대 본대, 통위영군(統衛營軍)이 공주에 도착하여 이후 공주전투에 참전했다.
10월 25일 효포전투가 계속될 때 효포의 북쪽 금강변에서는 북접 농민군이 금강변의 큰길을 따라 충청감영을 직접 함락하려고 시도하자 이를 막아 나선 선봉진 본대 및 통위영 부대 사이에 옥녀봉전투가 일어났다. 이때 효포전투에 참전했던 백낙완 부대가 옥녀봉을 방어하고 있던 선봉진 부대를 지원하면서 옥녀봉전투에서 북접 농민군이 퇴각하였다.
10월 25일 효포전투와 옥녀봉전투에서 패배한 남접과 북접 농민군 그리고 지역 농민군은 공주 남쪽 경천·논산과 정산으로 퇴각하여 11일간의 대치 기간을 거치며 전열을 가다듬었다(공주전투 제2차 대치, 10월 26일~11월 7일).
11월 8일과 9일, 이틀에 걸쳐 제2차 공주전투가 일어났다. 11월 8일 다시 공주 충청감영을 포위하기 시작한 농민군은 이인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이어서 공주 바깥산줄기를 포위했고, 다음날 11월 9일에는 공주바깥산줄기에 있는 우금티, 송장배미 산자락, 오실 마을 산자락, 효포 등 4곳에서 큰 전투가 일어났다. 화승총·죽창으로 무장한 농민군은 처절한 돌격전을 감행하였으나, 근대식 소총으로 고지에서 사격하는 조일진압군에 의해 많은 농민군이 학살당했다.
이후 11월 10일부터 14일까지 5일간 농민군은 공주에서 조일진압군과 대치를 계속했다(공주전투 제3차 대치). 11월 14일 저녁 공주 남쪽으로 진군한 조일진압군이 공주의 남쪽 이인·용수막·경천을 장악하면서 전선은 공주 대 논산으로 바뀌어 공주전투가 종결되었고, 11월 15일 조일진압군의 남하가 시작되었다.
이상이 본 논문에서 재구성한 22일간의 공주전투의 전개과정이다. 본 논문에서는 또한 공주전투에는 전국에서 모인 남접 농민군과 북접 농민군 그리고 지역 농민군으로 구성된 '10만여 명'의 농민군 세력이 참전했다는 가설을 제기하였다. 지역 농민군에는 공주창의소 의병장 이유상이 지휘하는 유생 의병 부대가 있었고, 정산 김기창 농민군, 공주 접주 장준환 세력 그리고 공주에 속한 유성의 최명기·강채서·박화춘의 농민군 세력이 있었다. 특히 11월 9일 공주전투에서는 농민군들이 우금티에서는 '40~50차례의 연속 공격', 송장배미 산자락에서는 '10여 차례의 육박혈전'을 감행하였다. 이 전투에서는 '항일전을 대비해 결사대를 조직해 연속 공격을 감행한 조직화된 농민군 대열'과 '농민군들의 죽음을 넘어선 항쟁 의지와 새 세상을 향한 염원'을 보여주었다.
이상의 22일간의 공주전투는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각계각층이 대동단결하여 민족자주의 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농민군의 단결되고 결사적인 투쟁은 일본군 농민군 진압전담부대 후비19대대의 90일 일정에서, 공주에서 서로분진대를 22일(10월 22일~11월 14일) 동안 저지시켜 일본의 조선 침략을 막아 나섰다.
공주전투에서 농민군들은 일본군에 의해 대단히 많이 학살당했다. 고개 우금티에서 농민군들은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40~50차례 연속하여 공격을 감행했으나 이 공방전으로 우금티 산자락에는 농민군의 시체가 가득하였다.' 우금티전투를 지휘했던 전봉준은 '1만여 명의 농민군이 5백 명만 남았다'고 했다. 송장배미산자락전투에서는 '육박혈전 10여 차례에 피는 내를 이루고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었다.' '봉정동 일대는 무덤이 되었고 봉정동에서는 삼 년을 두고 시체를 치웠고', '농민군의 피로 적셔진 효포의 혈흔천(血痕川)' 그리고 '이인에서 구시티 고개까지 길을 따라 약 2km 줄을 지어 있던 무덤떼'와 같은 구전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시기 농민군과 일본군의 대결은 중세 화승총과 근대 신식 소총의 대결이었다. 공주전투를 비롯한 대다수의 전투는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개입으로 농민군이 패배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시기 농민군들은 일본군의 신식 소총에 맞서 공주전투와 같이 정면 대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격 전쟁도 시도하였다. 농민군의 유격 전쟁 사례는 일본군의 서울-부산 병참부에 대한 습격과 통신선 절단 투쟁, 후비19대대 중로분진대에 대한 옥천-금산-연산에서의 유격 전쟁, 황해도에서 농민군의 유격 전쟁 등이 있다. 일본군 참모본부의 청일전쟁 공식기록인 『메이지 27·8년 일청전사(明治二十七八年日淸戰史)』에는 농민군의 항쟁을 '일본군의 청일전쟁 수행을 집요하게 방해하고 막아 나선 유격 전쟁'으로 기술하고 있다. 농민군의 유격 전쟁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기획이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반일 전쟁인 의병전쟁, 만주의 독립군 투쟁 등으로 이어지면서, 무장독립운동의 첫 출발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