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식민지기 개발정책 개입을 통한 조선인 엘리트 주도 '지역정치'의 최대치에 주목했다. '지역정치'란 지역개발 또는 집합재 배분을 둘러싼 권력 획득 및 조정과정을 가리킨다. 동시대 일본 지방자치는 신흥 지역상공업자들의 시 의회 장악, 고유사무로서 토목비 지출 증대, 시 세입 중 가장 고수익인 시영전기 운영이라는 3요소를 통해 확대되었다. 한국근대사 연구에서 평양 조선인 지역엘리트는 개신교를 일찍 받아들인 선구적 시민이자 식민지 지배기구와 거리를 둔 민족주의자로 인식되었다. 반면 '지역정치'를 보면, 일제하 평양부는 오히려 로컬 스케일에서 조선인 지역엘리트가 여론을 결집하고 개발거점을 확보하여 부 예산정치를 주도한 곳이었다. 평양은 조선의 부(협의)회 중 유일하게 민선 전환 후 조선인 유권자가 8번의 선거 중 7번 과반수를 차지했다. 식민지 조선의 부(협의)회에서는 중소상공업자와 전문직, 즉 중간계급으로서 지역엘리트가 주로 선출되었다. 즉 평양부(협의)회는 조선인 지역엘리트 과두제의 여론적 기반이었다. 이 여론을 기반으로 「조선시가지계획령」의 적용을 받지 않은 조선인 교외 부 주도 시가 계획, 조선 유일의 부영전기 확보가 이루어졌다. 1920~1937년 동우회(同友會) 계열과 같은 조선인 민족주의 그룹은 주요 조선어 민간지 지국 3개 중 2개를 점유하면서 도시 지역정치에 개입했다. 즉 본고의 목적은 조선인 주도 도시 '지역정치'의 최대치를 식민지 지배기구, 조선인 지역엘리트 간의 세력 변화, 계급 갈등 속에서 확인하려는 것이다.
1914년 「부제」 시행으로 평양부는 종래 행정구역의 0.5%로 대폭 축소되었고 일본인 인구가 20%인 '식민지 도시'로 바뀌었다. 조선인 자산가들이 많았지만, 평양에서 도시 지역 '자치' 논의를 다루는 상공단체, 교육단체, 도시 지방의회 중 부협의회에서만 조선인이 동일한 수로 임명되었다. 대한제국 말기 계몽운동 세력이 임명되었지만, 대다수가 남부 역전(驛前) 신시가('일본인 시가')에 세거(世居)해온 하급 토착 관리들이었다. 이들은 '단군·기자 계승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전릉(殿陵) 참봉의 세습을 명예롭게 생각했다. 부협의회 안건은 대개 예산안 심의였고, 이 시기에는 한정적이었다. 일본인이 일찍 이주한 인천, 부산에 비해 재정 규모는 소액이었다. 개발은 신시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독립세였던 부 영업세가 증징되었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에 따른 일본 '국책'의 변화로 '대평양'론이 제기되었지만, 그 재원의 출처는 의문으로 남았다.
이후 '국책' 주도 개발의 실패로 조선인 지역엘리트가 여론을 주도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호황에 따라서 1919년 일본 '국책'회사 주도의 동평양 시가계획(「평양대안시가계획」)이 시도되었다. 3·1운동 직후였기 때문에 조선인 유인책이 포함되었지만 구체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이 계획의 전제였던 동양척식(주)의 황산암모늄 생산 실패와 남만주철도(주)의 조선철도 위탁경영 종료 결정, 주된 담세자로서 대일본제당(주)의 행정구역 포함 거절, 1923년 평양 대수해로 동평양 시가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대신 1922년 워싱턴회의 이후 동우회의 구시가('조선인 시가') 상공업자 중심 후보단일화를 통해 평양부협의회는 조선인 동수 혹은 과반수가 되었다. 또한 증가한 조선인 공장주와 전등 사용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1927년 조선 유일의 전기부영화 운동이 성공했다. 그해 조선인 의원들은 동력, 전등 요금의 일괄 20% 인하에 성공했다. 다만 전기부영을 주도한 일본인 평양부윤은 전기적립금을 구시가 북부 교외인 서평양시가계획 재원으로 전용했다.
1929~1937년 평양 조선인 지역엘리트는 제한적인 경제적 수혜는 얻었지만 세력이 약화되었다. 1929년 평양부는 조선 최대의 인구밀집도를 보였다. 부 계획으로 북부에 시가지를 조성했으며, 남부 신시가의 재조일본인들은 반발했다. 반면 동우회는 식민지 지방제도 변경, 노동쟁의 강화, 조선인 상공업자의 지지세 약화로 주도권을 상실했다. 1931, 1935년 부회는 일본인 우세였고, 공황과 재조일본인의 방해로 서평양시가계획은 4년 지연된 1935년 준공되었다. 그렇지만 「조선시가지계획령」 이전의 시가계획은 지주친화적이었고, 평양 북부는 조선인 부동산 부자와 메리야스, 고무공장주 중심으로 새로이 조성되었다. 한편 부영전기는 1930년대 초 조선총독부 전력정책 변화로 다시 '사영화(私營化)'될 위기에 처했다. 부영전기를 둘러싸고 조선인 상공업자들은 동력요금 인하를 바라면서 재조일본인의 부 독립세 인하와 조선인 전문직(특히 변호사)들의 사회정책적 주장과 부딪쳤다. 결국 1936년 이후 조선인 상공업자들의 요금 인하를 위한 사영화 지지와 평양부회의 수적 열세로 1938년 부영전기는 동양척식(주)계 회사로 합병되었다.
전시체제기 평양부 개발은 군수공업화와 조선인 주도 '자치'기구의 종속화로 요약할 수 있다. 동양척식(주)계의 주도로 중화학공업화 중심 '평남 광역 개발'과 동평양 중심 '횡단형 개발'이 시행되었다. 평양상공회의소와 평양부회의 조선인 상공업자들은 제한선거권에도 유권자 숫자의 우위를 차지했지만, 제도 변화와 동양척식(주) 계열의 영향력 확대로 지역 '자치'기구는 그들에게 종속되었다. 평양시가지계획은 경성과 달리 부회 의원들의 입장이 자문안에 일부 반영되었지만, 결국 '국책'회사와 일본군을 위한 동평양 편 중 개발로 귀결되었다. 평양 서부의 공업지구 조성계획, 구시가와 동평양 연결로인 제2대동교 부설도 모두 형해화되었다. 또한 평양부는 부영전기가 동양척식(주) 계열 서선합동전기(주)로의 합병대가로 최대 주주의 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배전회사의 증자(增資) 과정에서 평양부의 신주(新株) 인수를 위한 부채가 '국책'의 이름으로 불인가되어서, 평양부회의 경영 개입과 주요 재원으로서 주주배당금 추가 확보는 난관에 부딪쳤다.
요컨대 식민지기 평양은 3·1운동 이후 조선인 지역엘리트들이 지방의회를 통해 식민지 개발을 주도하려고 했던 부였다. 그들은 조선 유일의 조선인 교외 개발('서평양', 실제로는 평양 북부)과 부영전기 운영이란 계급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조선인 주도도시 '지역정치'는 지역엘리트 과두제였고 3가지 딜레마를 가졌다. 개발에 개입하기 위해서 정통성이 결여된 식민지 지배기구와 끊임없이 접촉해야 했으며, 조선인의 권리 강화는 여러 방법으로 제약받았다. 또한 잔존하는 혈연·지연이란 사회관계망 속에서 지역엘리트 여론을 규합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조선인 지역엘리트와 노동자·빈민 간의 계급 갈등 속에서 '민족적 이익'이란 구호를 견지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시체제기 말기 평양 조선인 지역엘리트들은 식민지 지배기구로부터 "양자 취급"을 받는다고 절규했다. 또한 분단화 과정은 북한에서는 조선총독부에 협력하는 친일파, 남한에서는 개항 이후 개인 사업과 계몽운동에만 몰두한 시민으로 평양 지역엘리트의 상을 고착화했다. 이 과정에서 일제하 평양부(협의)회가 가진 정치성은 오늘날까지 망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