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의 목적은 1929년 12월부터 1930년 1월까지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의 서울학생시위 참여 과정과 결과를 분석하여 그 성격을 밝히고자 하는 데 있다. 숙명여고보는 1906년 설립 당시 황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설립 초기부터 일본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또한, 후치자와 노에와 같은 일본인 교원들의 학교 운영으로 학생들은 차별적인 현모양처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명여고보에서는 지속적인 항일운동이 전개되었고, 결국 1930년에 이르러 서울 지역 여학교들과 연합하여 대규모 시위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시위 참여 과정과 결과 등을 검토하며 숙명여고보의 서울학생시위 참여가 갖는 성격과 의의를 탐색해보고자 하였다.
서울학생시위는 1929년 10월 전라도 광주에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으로 서울 시내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3.1운동 이후의 대규모 항일운동이었다. 숙명여고보 역시 1929년 12월부터 1930년까지 1월까지 전개된 1·2차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차별적 식민지배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이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시위에 참여하였다.
1차 시위는 당시 서울에 조직되어 있던 사회주의 비밀결사단체들에 의해 전개되었으며, 숙명여고보는 3학년생 구무선에 의해 주도되어 1929년 12월 10일 만세를 부르며 학생들은 맹휴를 단행하였다. 1930년 1월에 전개된 2차 시위는 서울 시내 여학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숙명여고보의 경우 근우회 간부 허정숙과 휘문고보 5학년생 장홍염에 의해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숙명여고보는 400여 명의 전교생이 2차 시위에 참여하였고, 시위를 주도한 5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숙명여고보의 서울학생시위 참여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숙명여고보의 서울학생시위는 두 가지의 외부 경로를 통해 전개되었다. 기숙사생의 경우 근우회, 통학생의 경우 하숙을 통해 알게 된 학생들 간의 연결로 접촉하였음을 파악하였다. 둘째, 시위에 참여한 서울 시내 여학교 중 숙명여고보에서 가장 먼저 '퇴학' 처분이 내려졌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숙명여고보에서 이루어지던 식민지 교육 실상의 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셋째, 숙명여고보의 서울학생시위는 설립 이래로 꾸준히 이어지던 항일운동의 지속선상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1927년 맹휴의 경험은 학생들이 결집할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이처럼 1930년 전개된 숙명여고보의 서울학생시위 참여는 당시 전국적으로 형성되었던 분위기에 일조한 휘발적 사건이 아닌 설립 이래로 지속되어 온 구성원들의 자발적 항일의식에서 빚어진 적극적 저항의 표출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