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4·3 사건이 제주도 전역에 광범위한 사회공간적 변화를 가져왔던 것에 주목하여, 제주 4·3 '잃어버린 마을'의 기억경관이 4·3으로 단절된 장소기억을 상기시킬 수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잃어버린 마을'이 4·3에 대한 대항기억의 장소가 될 수 있음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연구 방법으로서 먼저 '잃어버린 마을'의 기억경관을 구성하는 요소를 '잃어버린 마을'을 기억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성된 기념경관과 4·3 이전 주민 거주를 보여주는 흔적경관으로 구분하였다. 두 경관 요소의 존재 여부에 따라 '잃어버린 마을'의 유형을 장소기억 환기형, 재현형, 내재형, 단절형으로 분류하여 각 유형의 분포 특성을 파악하였다. 다음으로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제주시 도남동, 제주시 조천읍 와흘리의 세 사례 연구 지역에 위치한 9개 '잃어버린 마을'을 대상으로 '잃어버린 마을'의 유형별 경관 현황을 검토하였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2018~2019년 4·3 유적 전수조사 사업의 결과로 발간된 『제주 4·3 유적』(2020)에 등재된 122개 '잃어버린 마을' 중 '흔적경관'이 잔존하는 마을은 86곳으로 다수를 차지했지만, '기념경관'이 조성된 마을은 39곳에 그쳤다. 첫째, 기념경관이 존재하고 흔적경관이 잔존한 마을(장소기억 환기형)은 28곳으로, 대체로 중산간 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4·3 당시 평균 가구 수가 전체 평균에 비해 많은 경향이 확인되었다. 사례 연구 지역 중에서는 '잃어버린 마을' 표석 및 '4·3길 표지판'이 설치된 동광리의 무등이왓·삼밧구석이 장소기억 환기형에 해당하였으며, 이들 마을에서는 '잃어버린 마을'의 구체적 장소기억을 기념경관을 통해 현재 잔존한 흔적경관과 연결시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기념경관은 존재하지만 흔적경관은 소실된 마을(장소기억 재현형)은 11개 마을로 4개 유형 중 가장 적었다. 사례 연구 지역 중 와흘리의 '물터진골' 마을이 이에 해당하였으며, 마을의 기념경관('잃어버린 마을' 표석)은 더 이상 마을의 구체적 흔적경관과 연결되지 않는 불완전한 기억경관을 이루지만 이는 4·3이 초래한 단절과 파괴의 지속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셋째, 흔적경관은 잔존하지만 기념경관이 부재한 마을(장소기억 내재형)은 58개로 '잃어버린 마을'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이들 마을은 4·3 당시 평균 가구 수가 전체 평균에 비해 적은 경향이 나타났다. 본 연구의 사례 지역 중에서는 동광리의 조수궤, 도남동의 웃동네, 와흘리의 궷드르가 장소기억 내재형에 해당하였으며, 이들 마을은 과거 마을의 흔적경관이 단편적으로 남아 있지만 4·3 당시의 기억과 연결되지 않으며, 기억경관의 소실 위험이 높음을 확인하였다. 넷째, 기념경관이 부재하고 흔적경관 역시 소실된 마을(장소기억 단절형)은 25개로 조사되었다. 이들 마을은 비교적 해안에 가까이 분포하고 있다. 특히 현재 제주시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구제주읍에 40%가 집중되어 있어 사례 연구 지역인 도남동 일대에서 확인되었듯 도시 지역의 개발 압력이 '잃어버린 마을'의 경관 소실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시사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위 검토 결과를 토대로 '잃어버린 마을'의 기억경관이 4·3의 장소기억과의 직접적인 연결성, 경관의 현재성 및 다원성의 특성으로 인해 대항기억의 장소가 될 수 있음을 제시하였다. 직접적 연결성은 장소가 가지는 절대적 위치에서 기인하며, 4·3으로 인한 단절이 현재 경관과 연결되기 위한 전제 조건에 해당한다. 경관의 현재성은 현재의 장소에 드러난 경관이 4·3이 초래한 공간적 변화의 반영임을 의미한다. 경관의 다원성은 '잃어버린 마을'의 경관이 단방향적 기념관과는 대조적으로 다원적인 경관 요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기념경관은 장소에 대한 특정한 서사를 전달하지만, 흔적경관 역시 기념경관과 독립적으로 경관에 표출된 장소기억을 전달하여 특정 기억의 독주를 제한하고, 4·3에 대한 대항기억을 유지할 수 있는 '잃어버린 마을' 경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본 연구는 4·3이 초래한 공간적 변화를 지리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공간적 변화에 대한 기억경관 만들기가 대항기억의 장소를 창출할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