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1980-90년대 한국 현대건축에서 하나의 주류 담론을 형성했던 비움에 관한 논의를 보다 상세하게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현대건축 담론의 중심에는 전통의 계승 및 현대화에 대한 논의가 있어왔다. 비움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해당 논의는 형태적 모방과 재해석에 치중됐다가 김수근의 공간사옥에 이르러 공간에 대한 해석으로 확장되었고, 이후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 '마당'과 같이 다양한 키워드를 통해 보다 폭넓게 확대되었다. 특히 4.3그룹에서 김인철의 '없음의 미학', 방철린의 '허(虛)의 건축', 민현식의 '비어 있음', 승효상의 '빈자의 미학' 등으로 비움과 관련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중 민현식과 승효상은 1990년대 세기말·세기초에 기해 새로운 시대정신과 건축가의 항성에 대한 고민에 대한 해답으로 비움을 제시했고, 이에 관한 글과 설계작품을 가장 활발하게 생산해 왔다.
본 연구는 비움에 대한 분석과 아울러 관련 담론이 형성되기까지의 역사적 맥락을 종합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전통성과 한국성의 틀 내에서 이해되어온 비움의 개념을 확장하여 조명하였다. 작품 분석에 있어서는 말과 글의 영역에 집중되었던 비움 논의를 설계의 영역까지 넓혀 종합적인 건축적 실천으로 접근하였으며, 구체적으로는 민현식과 승효상의 글과 설계작품을 통해 비움의 다양한 속성을 분류하고 그 근원과 세부적 차이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 결과 개념적인 접근에 있어 민현식은 자연에 대한 윤리의식에 초점을 맞췄으나 승효상은 삶의 의미를 회복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고, 이에 따라 민현식은 비움 자체에 관심을 둔 반면 승효상은 비움과 이를 둘러싼 공간/프로그램의 연계에 관심을 두었다는 차이를 밝힐 수 있었다. 그렇기에 민현식은 대상으로서의 비움, 승효상은 매개체로서의 비움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는 비움이라는 키워드 아래 묻혀있던 개념들의 차이를 보다 명확히 밝히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와 건축계의 가장 역동적이었던 시대에 공존했던 다양한 생각의 단면들을 드러낸다는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