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인쇄기계로 찍었다. '기계로 찍어낸 듯하다'는 말은 칭찬일 수도,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량생산된 인쇄물 중 어느 하나가 다른 모습이라면 그것은 대개 불량품으로 취급받는다. 모두 똑같은 모습을 추구하는 것이 인쇄술의 본질인 것이다. 반대로 개별성과 다양성, 즉 독자적 가치가 요구되는 소량생산 인쇄물에서는 여러 대안적 인쇄술을 활용하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20세기 중후반에는 플럭서스를 중심으로 고무도장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고, 잡지 『고무』, 신문 『스탐파 뉴스페이퍼』를 비롯한 여러 인쇄물이 만들어졌다. 당시 활동하던 이들에게 고무도장은 분명 인쇄 재료였지만, 그것이 오프셋이나 그라비어 등 주류 인쇄술에 견줄 만한 품질과 효율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명칭부터가 '인쇄판으로 그린 그림'인 판화가 그렇듯이, 고무도장도 인쇄와 그림 사이 어딘가에 존재했다.
다음과 같은 단순한 질문을 던지며 논문 계획을 시작했다. 고무도장이 인쇄 혹은 그림 재료로 그토록 인기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인쇄물을 소량생산하는 이유에 독자적 가치를 부여하려는 목적이 있다면, 균일함을 덕목으로 소품종 대량생산을 추구하는 기존 인쇄술을 토대로 계획해야만 할까? 다품종 소량생산이 요구되는 현대에서 고무도장이 발전된 제판술을 만났을 때 어떤 가능성을 지닐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19세기 말 고무도장이 개발된 배경, 전성기였던 20세기와 그 후의 활용 사례들, 고무도장 제작 기술의 흐름과 대표적 기업·제품들을 조사했다. 또한 도장 찍는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쇄술이자 최근 빠른 기술 발전을 통해 높은 품질을 갖추며 오프셋을 이어 점유율 2위의 주류 인쇄술로 자리잡은 '플렉소그래피'가 고무도장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조사를 거쳐 고무도장 인쇄의 특성을 4가지(간편성, 범용성, 개별성, 현장성)로 요약했으며, 해당 특성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을 때 고무도장이 인쇄술로서 지니게 될 가능성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