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연구대상으로 선정된 21기 남조 전실묘 및 族葬, 陵園 禮制施設 등을 포함한 남조 전실묘문화와 이질적인 전실묘문화가 수용된 백제 묘제를 집중적으로 비교 검토하였다. 그리고 백제가 남조 전실묘문화를 받아들였을 때에 수용방식 및 태도를 밝히기 위해 남조 묘제와의 多角度로 비교분석을 진행하였다.
웅진기에 백제는 남조와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고, 남조와의 교섭에 관한 기록에는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식 行使를 통하여 남조 선진문물이 직간접적으로 백제에 전래하였다. 빈번한 對南朝交涉에서 백제는 남조에 대한 인식과 이해는 여타 인근 국가를 능가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정황은 백제 사절의 行禮 중 남조 능묘와 지상 석각에 대한 실견이 이루어졌을 개연성도 추론하게 한다.
한편 남조 전실묘문화를 도입해서 조영된 무령왕릉은 王級 무덤이지만 남조에서의 同等身分位階인 王墓와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특히 무덤의 규모로 볼 때 남조 王墓보다 第三品인 輔國將軍墓와 더 가깝다. 그러나 무령왕릉 封土의 규모로 볼 때는 남조 王墓와 유사하다. 무령왕릉보다 더 작은 송산리 6호 전축묘는 규모로 볼 때 남조 第五品인 海陵太守 謝珫墓와 가깝다.
族葬의 경우는 문헌기록에 의거하여, 남조 宋·齊·梁·陳 네 나라 帝陵의 분포는 모두 도성으로부터 20里 이상의 거리를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조 王墓의 분포양상은 제릉과 유사하다. 이런 공간배치 양상은 郊外分散型 族葬에 속한다. 반면에 백제는 왕릉이나 귀족무덤의 분포양상은 한성기 이래 웅진기와 사비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도성과 지근거리에 고분군을 조영하고 고분군 내에서 무덤을 밀집하게 배치하는 모습이 특징적이며, 이런 공간배치 양상은 近隣密集型 族葬에 속한다. 이에 따라 族葬으로 볼 때 백제는 남조와 뚜렷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한편 陵園 禮制施設로 보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능원 담장, 墓闕建築, 墓儀石刻, 神道 등을 통해 남조시기에는 정연한 능원구획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그러나 무령왕릉을 비롯한 백제 전축묘에 관해서 현재까지 확인된 상장의례시설은 정지산유적 및 제사와 관련된 송산리고분군 A지구 方壇積石遺構 두 군데뿐이다. 이로써 백제는 남조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실묘문화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陵園 禮制施設을 수용하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출토유물의 類別로 보면 남조와 무령왕릉 간의 공통점이 많이 존재하지만 차이점이 없지는 않다. 공통점은 모두 묘지석이나 磁器類遺物 등이 부장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남조 전실묘에서 石製器物의 부장은 대부분 묘주의 신분위계가 皇帝나 王侯에 해당하는 무덤에서만 확인되어 있어 무령왕릉 鎭墓獸의 제작을 석재로 체용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土器(陶器)의 부장에서는 현저한 차이가 존재한다. 남조의 帝陵이나 王墓에서는 다수 도기나 俑을 부장하지만 무령왕릉에서는 한 점도 나오지 않았다.
이밖에 묘실 내의 부장품 配置方式과 祭祀空間은 무령왕릉과 童家山 南朝墓 부장품의 종류뿐만 아니라 유물이 놓인 위치까지 많이 유사하다. 더 나아가서 묘실 내에서 거행하는 祭禮行事에 관해서도 무령왕릉은 童家山南朝墓와 많이 유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무령왕릉에서는 구조적 특징뿐만 아니라 묘실 내의 부장품 配置方式과 祭祀空間까지 남조의 영향을 다수 찾을 수 있다.
그다음, 송산리 6호 전축묘 벽화의 계통에 대해서 종래 '중국 南朝의 影響說', '고구려의 影響說', '백제의 創案說' 세 가지 학설이 존재한다. 그중 '백제의 創案說'은 설득력이 너무나 빈약해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머지 '南朝의 影響說'과 '고구려의 影響說' 두 학설은 전축묘라는 묘제, '梁官瓦爲師矣'라는 銘文塼, 빈번한 對南朝의 교섭, 남조 四神壁畵塼室墓의 존재, 蕭梁 工匠과 畵師의 청구 등 측면에서 볼 때 백제와 적대관계인 고구려보다 남조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서 壁畵塼築墓를 축조하였다고 추론된다.
한편 교촌리 3호 전축묘 성격에 대해 종래 未完成墳으로 이해되었지만 무덤의 구조적 특징 및 중국 전실묘 사례들의 종합적인 검토를 통해 3호 전축묘의 初始形態는 연도부를 성형하지 않고 좌우 전벽의 형태로 마무리된 모습으로 판단된다. 또한 3호 전축묘의 축조 시기는 무덤의 구조적 특징, 축조기법, 墓塼의 규격, 方形 燈龕의 설치 등 측면을 비교분석함으로써 웅진천도 이후 文周王代부터 東城王代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對南朝交涉 행위에 기초한 결과일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으로 판단된다. 더 나아가 백제 전축묘의 희귀성, 塼築技術, 벽돌의 사용 등을 감안할 때 3호 전축묘는 백제 왕실구성원의 무덤임이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塼窯와 무덤 간의 配置關係에 대해 살펴보았다.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 전축묘 墓塼의 생산지로 추정되어 온 곳은 공주에서 약 23km 떨어져 있는 부여 井洞里 窯址이다. 이로써 백제에서 墓塼을 생산하는 塼窯는 무덤에서 상대적으로 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남조의 경우는 塼窯를 주로 무덤과 가까운 곳에 배치하는 현상이 보편적이었다. 따라서 남조 전실묘문화를 수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塼窯와 무덤 간의 空間配置에서 백제와 남조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무령왕릉을 비롯한 백제 전축묘를 백제왕실에서 채용한 점은 백제의 웅진시기를 이채롭게 하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전축묘를 포함한 출토유물에서도 남조의 영향이 다수 관찰된다. 그러나 族葬, 陵園 禮制施設, 부장품의 類別, 塼窯와 무덤 간의 配置關係 등 측면에서 볼 때 백제와 남조 간에 뚜렷한 차이점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차이점은 백제가 남조 선진문물을 도입하였을 때 외래문화를 수용하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았다. 즉, 백제는 남조문화를 도입하였을 때에 전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유문화를 고수하면서 필요한 부분만 채택하여 학습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