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의 목적은 랑시에르의 '해방된 주체' 개념에 기초하여 교사의 실존적 존재 방식을 교육철학적으로 탐색해보고자 하는 데 있다. 이 연구는 승진의 갈림길에서 나 자신을 잃어간다는 연구자 개인의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지만, 이것을 비단 한 개인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를 성별의 문제라고도 볼 수 없는 것은 과거에 비해 남성들이 독점해오던 사회진출의 성역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 세대에 비해 젊은 세대가 승진보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을 중요시한다고 하여, 이것을 세대 간의 문제라고 볼 수도 없다. 이는 특정한 조직에 들어간 직업인으로서의 인간 모두에게 승진과 비승진이라는 양자택일의 갈림길 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를 상기하지 않더라도, 우리 개인들은 개척되지 않은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이 힘들지만 분명 의미 있는 삶이라는 것을 일상의 경험을 통해 의식한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타자의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가 직업이나 직위의 불평등을 이미 규정해놓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감각적인 것의 나눔(partage du sensible)'이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감각적인 것의 나눔은 공동체와 공동체의 구성원이 공동체에서 차지하는 몫과 자리들을 나누는 경계선 및 분할선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체계다. 즉, 그것은 학교에서 교사들이 공통적으로 가질 수 있는 몫과 절대적으로 가질 수 없는 배타적인 몫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러한 몫의 불평등은 구성원들로 하여금 몫을 가지고자 하는 계급투쟁에 몰두하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개인들의 실존 욕구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 만드는 불평등에 의해 살상될 수 있다. 내가 어떤 인간으로 실존하느냐보다 현실의 문제가 앞설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르트르는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은 개인들의 선택에 따른 결과라고 강조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에게만 의지한다면, '해방은 지식인의 몫'으로서, 우리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 만드는 불평등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지식을 반드시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식은 그 목적이 해방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그것의 목적은 감각적인 것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한 계급 투쟁으로 변질될 수 있다. 이는 입시문제만 보더라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랑시에르에 따르면, 굳이 지식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평등을 의식한다면, 즉 일상의 경험을 통해서 누구나 해방될 수 있다.
나는 승진과 비승진이라는 길밖에 주어지지 않은 학교 안에서, 랑시에르의 '해방된 주체'에 의지하여 교사의 실존을 탐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II장에서는 랑시에르가 해석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주목하여,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그것이 어떤 논리적 귀결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 귀결에는 근본적인 계산착오가 있는데, 바로 민중이 사회의 구성원임에도 불구하고 구성원으로서 그 어떠한 정치적 몫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왜곡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역설적으로 민중은 몫이 없는 이임에 불구하고 몫을 요구하기 위해 실존의 자리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중이 공동체에 기여하는 자유처럼, 교사가 학교에 기여하는 교육도 공허한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교사들은 그것을 배타적 가치로 전환시킬 수 있다.
III장에서는 과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소속 교사들의 주체화를 살펴보며, 불화가 소멸된 학교와 그에 따른 교사들의 실존적 문제를 조명한다. 감각적인 것을 나누는 방식에는 치안과 정치 두 가지가 있다. 치안은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각각의 몫과 몫의 부재 그리고 정체성을 규정한다. 정치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규정하는 치안을 재편하는 것이다. 이때 정치는 그들이 스스로 의식하는 정체성과 치안이 규정한 정체성 사이의 불화에 의해서 실현될 수 있다. 문제는 합의민주주의가 구성원들의 정치를 가능케 하던 불화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불화가 소멸된 학교에서는 세 가지 정도의 문제를 예상할 수 있다. 먼저, 교사들이 학교에서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따라 양분된 방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양분된 존재방식은 교장과 일반교사 사이의 소통을 어렵게 할 수 있다. 치안은 구성원들에게 각자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진보의 관점에서 보면 늘 같은 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어서 교사를 퇴보하게 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교사는 그들이 학생들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이름대로 살 수 없다. 그저 사회의 부분에 지나지 않거나 현실의 문제에 허덕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본인의 해방을 통해 궁극적으로 학생을해방시킬 수 있는 교사야말로 선생이라고 불릴 자격을 가질 수 있다.
IV장에서는 합의민주주의에 의해 불화가 소멸된 학교에서 어떻게 불화가 가능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랑시에르의 '평등'에 의지하여 새로운 주체화 가능성을 엿본다. 평등은 학교의 부분에 지나지 않던 교사가 종별적 형태의 왜곡을 통해 정치적 주체화를 실천하게 할 수 있다. '교육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한다'는 양식을 통하여 학교 안에서 교사의 부재를 증명하고, 실존하는 '선생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논의한다. 선생으로서의 인간은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 만드는 불평등에서 해방되어, 치안과 정치 사이에서 그리고 부분에 해당하는 교사와 전체에 해당하는 인간 사이를 넘나들며 실존할 수 있다. 그들이 의식하는 평등은 교사 단체가 추구하는 결과적 평등은 아니지만 더 나은 평등을 이끌어낼 수 있고, 동시에 그들이 하나의 인간으로서 실존에 이를 수 있도록 한다. 이는 해방된 교사만이 학생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교사라는 직업이 가지는 고유함 때문이다.
인간 모두는 실존을 원한다. 그러나 계급투쟁이나 생계 등의 현실의 문제가 실존의 문제를 늘 살상시키기 일쑤다. 교사들 역시 학생들을 가르치며 먹고 살아간다. 따라서 교사들도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의심 없이 참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기입되어 있는 평등을 의식할 수만 있다면, 정치적 주체화를 통해 실존에 이를 수 있다. 물론 인간실존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문제는 여전히 어두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으로서의 인간실존은 그 시간이 고달플지라도 한 줌도 내어줄 수 없는 해방된 삶이다. 현실의 문제가 고되고 어두울수록 그들의 실존은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