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조선후기의 학자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학풍 형성 배경과 그의 문인들이 김창협의 정치적 · 사상적 위상을 어떻게 확보했는지 고찰한 것이다.
김창협은 장동 김문이라는 가문적 배경을 바탕으로 서인의 영수 宋時烈과 교류할 수 있었다. 송시열과의 학문적 교류는 자연스럽게 이후 노론 내에서 김창협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였다. 또한 송시열과 함께 수행한 『朱子大全箚疑』편찬은 김창협의 견해에 대한 송시열의 인정이 드러나는 측면이 있었다. 송시열은 죽기 직전 『주자대전차의』 의 완성을 보지 못하자, 서울의 김창협과 충청도의 권상하를 자신의 嫡傳으로 지목하며 완성에 대한 부탁을 맡겼다. 이는 곧 송시열 문인의 분기를 의미했다.
한편, 김창협의 학풍 형성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李端相과 趙聖期, 林泳 등을 지목할 수 있다. 송시열을 만나기 이전 김창협은 이단상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단상은 김창협의 장인어른이기도 하였으며, 학문적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상수학, 역학 등 다양한 학문을 고루 섭렵했다. 이는 곧 김창협의 학풍의 다양성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또 조성기와 임영은 서울 사상계에서 율곡과 퇴계의 학문을 절충했던 인물로 유명했다. 이들과의 교류는 自得의 태도를 견지하도록 하여, 김창협의 理 중시 견해를 확립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김창협은 아버지 金壽恒이 죽은 이후 양주 인근으로 이동하여, 석실서원에 정착하게 되었다. 석실서원은 김창협의 증조부 金尙憲과 그의 형 金尙容이 배향된 서원으로, 그 서원을 둘러싼 지역은 노론계 인물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김창협이 석실서원에서 강학을 열자, 전국에서 그의 문인이 되기를 자처하는 이들이 찾아왔다. 이들 문인 중 일부는 이후 낙론 학맥 형성에 있어 모태가 되는 인물들이었다.
김창협 사후, 서인 내 노론과 소론의 분기는 가속화되었다. 특히 노론은 尹拯의 背師 문제, 박세당의 『思辨錄』 문제, 최석정의 『家禮源流』 문제 등을 거치며 소론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다. 이러한 일련의 공격은 이후 노론의 중심축이었던 장동 김문을 반격의 대상으로 삼도록 만들었다. 특히 소론의 공격은 송시열의 제자였던 김창협에게 집중되었다. 소론은 대부분 가문에 대한 원색적 비난이나, 송시열과의 관계, 성혼을 무시한 일 등을 중심으로 공격하였고, 결국에는 석실서원에서의 출향을 주장했다. 이러한 소론의 비판에 대해 김창협 문인 중 어유봉이 대표하여 辨誣, 陳情에 대한 疏를 올리는 등의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이후 英祖 즉위 이후 노론이 집권하게 되자, 김창협은 신원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위상의 회복과 동시에 노론 내에서는 사상적으로 분기하고 있었다. 송시열 문하에서 권상하와 김창협은 학문적 주도권을 갖고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두 인물의 스승 송시열에 대한 태도 차이, 학문적 견해 차이 등이 존재했다. 김창협 사후 노론 내에서는 김창협의 四端七情說을 문집에 싣지 못하게 하는 등 김창협에 대한 학문적 배제가 존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창협의 제자였던 어유봉은 김창협의 학설을 정리하였다. 그 중 『주자대전차의』편찬 과정에서 수록되지 못했던 김창협의 견해를 담은 문목을 취합하여 『朱子大全箚疑問目』의 합편을 완성하였다. 특히 이 시기는 권상하의 문인과 지각설에 대한 견해차로 대립하던 때이기도 했는데, 이러한 내용은 『주자대전차의문목』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 과정을 통해 김창협 문인 내에서 김창협 학설을 바탕으로 낙론 학맥을 확립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