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미국 현대 정밀-사실주의 미술가 필립 펄스타인(Philip Pearlstein, 1924~2022)의 1980~1990년대 누드화에 관한 연구이다. 펄스타인은 1960년 인체 누드화를 시작하여 1980~1990년대에 이르면 정밀-사실주의 기법 성취와 함께 독자적인 화면 조형성을 보여준다. 이 시기 펄스타인은 인체와 사물에서 각각의 개별적인 특성을 제거하여 중립적으로 표현하였다. 펄스타인 누드화에서 중립적 개체가 된 인체와 사물은 화면을 구성하는 조형 요소가 되었고, 펄스타인은 개체들을 통하여 누드화의 힘과 균형, 방향성과 움직임을 나타내며 추상의 화면 구성과 3차원 공간 조형성을 보여준다. 펄스타인은 구성 과정에서 인체와 사물을 캔버스 프레임으로 잘라 감상자의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그러나 펄스타인은 객관적 시선으로 표현할 뿐 자신의 누드화에 어떠한 의미 부여도 하지 않았다. 이에 본 논문은 1980~1990년대 펄스타인 누드화의 나타난 화면 구성의 특징과 조형성을 고찰하면서 그가 누드화를 통해 추구한 미술이 무엇인지 연구하고자 한다.
1950년대 초반 미국 미술계는 추상표현주의가 휩쓸고 있었고 펄스타인도 추상표현주의 영향을 받아 예술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펄스타인은 추상표현주의가 자신의 예술을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표현 방식을 모색하였다. 펄스타인은 주류에서 소외된 사실적인 회화가 또 다른 미술 방향의 가능성이라 생각하여 1960년 인체 누드화를 통해 구상 회화를 시작하였다.
1980~1990년대 펄스타인의 정밀-사실주의 누드화는 인체뿐 아니라 사물, 공간의 그림자까지 명확한 윤곽선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펄스타인의 젊은 시절 직업이었던 그래픽 디자인의 영향으로 그는 디자인 작업을 통해 습득된 방식을 자신의 회화에도 적용하였다. 펄스타인은 대상의 형태를 자기 눈으로 집요하게 관찰하여 섬세한 윤곽으로 나타냈다. 정교한 형태는 매끈한 페인팅으로 이어지며 누드화에 포함된 모든 형태, 공간과 패브릭 패턴까지 선명하게 표현되었다. 펄스타인은 누드화를 구성할 때 인체, 사물, 공간을 전통적인 방식이 아닌 퍼즐을 맞추듯 부분적으로 그려나갔다. 그 결과 누드화는 원근과 상관없이 동일한 초점으로 사진과 같이 평면적이고 매끈한 화면이 되었다. 이것은 언뜻 보면 사진을 기반으로 하는 하이퍼리얼리즘과 동일하게 보이지만 펄스타인은 사진이 아닌 자기 눈을 통해 대상을 현장에서 직접 관찰하여 그리는 방식을 택하여 다른 하이퍼리얼리스트들과는 구별된다.
이러한 정밀-사실주의로 표현된 1980~1990년대 펄스타인의 누드화는 추상적 화면 조형성을 보여준다. 펄스타인의 "나의 회화는 추상에 기반한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몬드리안의 추상에서 가로, 세로선을 통한 확장과 수축, 색면의 밀고 당기며 유지되는 변화와 균형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 추상표현주의자 프란츠 클라인의 선적인 구성에서 영향을 받아 화면의 중심축을 만들고 개체들의 방향성, 움직임을 설정하여 올오버의 확장되는 화면 구성을 추구했다. 이처럼 펄스타인은 화면 구성에서는 모더니즘 추상의 영향을 받았으나 모더니즘의 핵심적인 원리인 평면성을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펄스타인은 3차원 공간 구성을 받아들이며 누드화의 조형적 변화를 끊임없이 시도하였다.
펄스타인은 누드화의 인체와 사물에 상징성이나 서사를 부여하지 않았다. 펄스타인은 어떤 예술가도 누군가의 영혼이나 내면적인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펄스타인은 자신의 누드화가 쿠르베의 사실주의 회화처럼 사회상을 나타내거나 철학적,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예술의 가치가 상징성이나 의미 부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대상을 사실 그대로 기록한 기술의 성취와 형식으로 달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펄스타인은 대상의 현존하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자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펄스타인은 자기 눈으로 관찰된 인체와 사물을 객관적으로 제시할 뿐이다. 그러나 화면 상황은 해석의 여지가 곳곳에 존재하여 누드화에 의미를 찾는 것은 감상자의 몫이 된다. 펄스타인의 이러한 태도는 작가의 주관성이 작품의 중요한 가치였던 모더니즘적 시각에서 벗어나 관람자의 다양한 해석과 의견으로 작품이 완성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이자 펄스타인이 추구한 리얼리즘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1980~1990년대 진행된 펄스타인의 누드화는 자신의 직업이었던 상업 디자인에서 영향을 받아 정밀-사실주의 기법을 성취하는데 접목하였고 모더니즘의 추상과 추상표현주의, 그리고 하이퍼리얼리즘 방식을 존중하면서도 무조건적 수용이 아닌 그 틈새에서 자신만의 차별되는 방식을 찾아간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