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독일 미술가 가브리엘레 뮌터(Gabriele Münter, 1877-1962)의 청기사(Der Blaue Reiter) 시기에 관한 연구이다. 뮌터에게 청기사 시기는 그녀의 작품 변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청기사 그룹이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11년부터이지만 뮌터와 칸딘스키가 독일 바이에른(Bayern) 지역의 무르나우(Murnau)에 정착하기로 결심한 1908년-1909년부터 청기사 이념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뮌터는 이때부터 사물의 재현이 아닌 내면의 본질을 담아야 한다는 청기사 이념이 작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주목하여 본 논문은 뮌터가 어떻게 작품에 청기사 이념을 담아냈는지, 다른 청기사 예술가들과 어떻게 다른 독자적 의미를 지니는지, 계속해서 새로운 조형적 특징을 보여주며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고자 했던 방식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청기사는 당시 19세기 물질주의나 관료주의의 사고방식과 관습에 발발하여 탄생하였다. 예술가들은 새로운 세계로 눈을 돌려 자연의 재현에서 벗어난 주관적인 감정을 순수한 색채와 형태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 결과 원시 예술의 관심으로 이어졌다. 뮌터 역시 인상주의 화풍에 머물다가 원시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형식을 탐구했다. 뮌터는 대부분 작품에 실내 풍경, 주변 인물, 정물과 같은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대상을 주제로 다루었는데 이 시기에 뮌터가 흥미를 느낀 민속 예술품과 유리이면화(Hinterglasmalerei)가 작품에 주로 등장했다. 뮌터에게 있어 민속 예술은 그녀의 청기사 시기 작품 제작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뮌터의 작품에 나타나는 단순화된 형태와 굵은 윤곽선, 강렬한 색채와 같은 형식은 유리이면화의 조형적 특징으로 이를 자신의 작품에 적용하여 평면적인 화면을 구성하였다. 당시 청기사 예술가들도 유리이면화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그리기도 했지만, 뮌터는 무르나우 지역에서 꾸준히 유리이면화를 그린 하인리히 람볼트(Heinrich Rambold, 1872-1953)에게 직접 기법을 배우며 가장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뮌터는 그녀가 평소에 관심을 두었던 신지학(Theosophy, 神智學)과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가 예술에 있어 중요하게 강조한 '내적 필연성'(inner necessity)을 민속 예술에 접목하여 자신만의 화풍을 확립했다. 신지학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물질주의를 배격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점에서 예술가들이 많은 관심을 가졌다. 뮌터는 민속 예술품을 단순 재현의 대상이 아닌, 내면과 정신을 시각화하고 구체화하기 위해 대상의 색과 형태를 변형시켜 신비화하거나 작품 속 공간을 왜곡하여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뮌터의 작품은 추상 형식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창작 작업의 정점이라 평가받는다.
뮌터의 내면에 대한 탐구는 그녀의 추상 작품에서 계속 나타난다. 뮌터의 추상은 청기사 예술가들이 그렸던 추상화와 차이를 보인다. 예술의 목적은 인간의 영혼을 물질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된 칸딘스키의 추상과 달리 뮌터는 자신의 감정 표출을 기반으로 한 추상 작품을 선보였다. 당시 뮌터는 칸딘스키와 소원해진 관계와 여성 예술가로서의 고민이 작품에 추상의 형태로 나타났고 이는 추상을 인간의 심리학적 필연성에 염두하여 정의한 빌헬름 보링거(Wilhelm Worringer, 1881-1965)의 이론을 연상시킨다. 보링거는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안의 감정이 추상에 대한 충동을 일으킨다고 말했다. 이렇게 구성된 뮌터의 추상은 내적 심리를 표현하는 수단임과 동시에 그녀의 내면 모습으로 읽힐 수 있다.
이처럼 뮌터의 청기사 시기 작품은 그녀가 독자성을 구축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다양한 주변의 영향을 받으며 대상의 재현에서 벗어나 추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뮌터의 청기사 시기는 그녀의 예술 활동에 있어 정체성을 탐구하고 기틀을 마련한 시기라는 점에서 연구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