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이후 국제법과 평등사상이 유입되면서 한민족은 화이관을 탈피하기 시작하였고, 청이 속국화 정책의 강도를 높여가자,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국가로 자각·주장하기 이르렀다. 갑오기에 이르러 조선은 독립국가로서 지위를 획득하였고, 신분제 폐지로 인한 대내적인 평등구조를 확립하였다. 이에 한국인들은 비로소 근대 시민·민족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장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대한제국 선포 이후 인민주권을 지닌 시민이 아닌 '황제의 신민'으로서의 통합과정을 거쳐야만 했고, 이 시기, 황제에 충성하고 애국하여 근대국가를 수립한다는 기치 하에 각종 상징, 표징, 가사, 기념물들이 생산되어 일반인들의 일상생활에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는 엄밀한 의미의 민족주의, 즉 인민주권이 함축된 민족주의가 형성되기 전 단계로, 근대국가를 설립하기 위한 국가주의적 민족주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을사보호조약이라는 민족적 위기에 봉착하자 계몽운동가들은 황제의 신민이 아닌 한민족으로서 국민과 민족을 창출하고 통합하기 시작했다. 즉, 황제와 국가가 붕괴되면서 이를 대체할 대상으로서 민족과 민족혼이 그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여기서의 민족도 개인의 자유, 평등, 권리가 상대적으로 간과되고 민족을 위해 충성하는 애국의 대상으로서의 민족이었다. 그것은 국가가 망하는 상태에서 국민주의를 주장했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시대 만들어진 한국의 민족주의 담론과 민족의 이미지는 그 기본 유전인자가 완성되어 국사책과 신문, 강연 등에서 동어 반복적으로 재생산·유포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유전 인자는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바로 우리가 진리로 믿었던 반만년의 역사와 단일민족이라는 신화가 그러하다. 이러한 민족주의 담론을 새롭게 발굴한 대성학교의 역사책을 분석하여 살펴보았다. 민족주의 역사 서술은 공통의 문화, 기억, 역사를 창출하여 보급하고, 민족을 통합시키고 있다. 바로 여기서 민족은 상상으로 만들어진 공동체이며, 이 과정에 민족주의 역사서술이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창조 당시 강요된 애국심과 충성심 그리고 실천적 저항 민족주의라는 특징은 한국민족주의로 하여금 집단주의와 폐쇄성, 국가주의적 요소를 아울러 내포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