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의 내부적 성숙으로 발생한 서구의 민족주의와 달리 중국 근대의 민족주의는 서구 제국주의의 압력이라고 하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발생, 발전하였다.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 위기의식에 휩싸여 있던 중국에 때마침 소개된 사회진화론은 천하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열국병립의 세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다. 1903년경이 되면 민족주의만이 구국의 처방이라고 하는 논의들이 확산되어간다.
중국에서 문화민족주의는 1905년 성립한 국학보존회의 국수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1920년대의 국고파와 학형파, 그리고 1930, 40년대의 중국본위적문화건설론과 항전시기의 학술활동, 현대신유가에 이르기까지 반세기동안 중단없이 전개되었다. '문화구국' '학술구국'을 외치며 중국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추구해 온 중국의 문화민족주의는 제국주의의 문화침략을 반대하고 국내사상계의 맹목적 서구화를 저지하고 중국인의 민족문화에 대한 자신감을 제고하는 등 방면에서 중요한 작용을 발휘했다.
공동의 역사 경험을 통해 형성된, 한 민족의 문화가 갖는 고유성과 개별성을 중시하는 문화민족주의의 입장은 언뜻보아 인류 보편세계로의 지향을 완전히 거부하는 듯 하지만 민족이 망국멸종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의 최후의 근거, 즉 존재증명의 자기확인을 민족에게서 구한 것을 의미한다. 또한 민족에의 집요한 고집 즉 원리주의의 철저함 때문에 타의 각민족이 갖는 문화의 고유성과 독자의 가치도 솔직히 승인하였다. 그것은 서구열강의 문화적 침략에 대한 저항민족주의였으며 어느 정도는 열린 민족주의로서의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문화민족주의 또한 민족주의의 양면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개혁개방 이후 정체성의 위기와 소수민족의 분리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1980년대 후반부터 다시 등장한 문화민족주의는 겉으로는 유가를 비롯한 '국학열'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과거의 천하적 세계질서를 재편하여 동아시아의 맹주가 되려고 하는 정치적 목적이 드리워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