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에 있어서 "전쟁"은 낯선 소재가 아니다. 한국영화사에서 전쟁은 남과 북이라는 분단 상황을 불러일으킨 한국 전쟁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 전쟁은 한국 역사에 있어 부인할 수 없는 공통의 정신적 외상(trauma)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한국 전쟁과의 시간적 거리만큼 전쟁을 다루는 방식이 다양해졌다는 사실이다. 1960년대 전쟁 영화에서 한국 전쟁은 강박증에 가까우리만치 심각한 주제 의식으로 전경화되었다. 이에 비해 1990년대 이후 전쟁을 다룬 영화는 전쟁영화라는 장르보다 오히려 멜로 영화의 면모를 띄는 경우가 더 많다. 영화의 주제였던 "전쟁"이 점차 소재화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주제가 아닌 소재로서의 "전쟁"은 1990년대 이후 제작된 영화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1998년 제작된 강제규 감독의 『쉬리』는 한국 전쟁과 분단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블록 버스터 상업 영화의 문법에 전유함으로써 새로운 한국 영화의 가능성을 제안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영화는 분명 전쟁에 대한 강박적 죄의식이나 윤리적 의무감에서 벗어나 있는 듯 보인다. 적극적으로 읽자면 이러한 변화는 "한국 전쟁"이라는 집단적 상처를 개인사로 구체화하겠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진다. 선언은 한편 전쟁이라는 불변의 현실을 환상과 상상력을 통해 재구성해보고자 하는 노력으로 연계된다. 문제는 그 재구성이 역사의 상처에 대한 반성적 치유인가 아니면 대중 영합적 자기 합리화인가이다. 본 고에서『쉬리』이후 한국 전쟁과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 작품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주제가 아닌 소재적 차원에서 원용되고 있는 한국 전쟁의 면모와 그것의 의의 및 한계에 대한 재고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