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 후 야기된 1955년 '계(契)소동'과 이에 대한 국가의 대응방법을 통해서 당시의 젠더화된 국가의 모습을 재현해 볼 수 있다. 당시 광주를 비롯한 전국적인 계파탄의 원인은 경제정책의 실패에 기인한다. 국가와 기업은 공적 금융에서 부족한 자금을 사적 금융인 사설계에 의존하였다. 사설계를 통해 부녀자의 돈이 기업에 동원되었다. 전쟁 후 생계부양자가 된 부녀자가 공적 영역의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사설계를 통한 이자의 증식을 통해 생계비를 마련하였다.
1955년 계파탄을 대응하는 국가의 정책결정과정에서 생계부양자가 된 부녀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치안유지 차원에서 경찰청장이 '사설계해체명령'을 발하거나 혹은 계는 순수한 민사관계이므로 국가는 이 부분에서 손을 떼라는 '국회 진상조사단'의 정책제안이 내려질 뿐이었다. 정책결정과정에서 생계부양자가 된 부녀자에 대한 인식과 이들을 위한 정책적 고려는 없었다. 계에 대한 사회적 담론에서도 가정 파탄이 난 부녀자를 허영과 사치 때문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계소동에 대한 국가의 대응방법은 이중적이며 젠더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계가 파탄되지 않았을 때는 국가도 기업도 큰 손 계주도, 심지어는 남편도 이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계가 파탄되자 이들 모두는 일제히 국가 경제정책의 실패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계를 든 부녀자를 비난하였다. 부녀자들은 국가경제정책의 실패를 한 몸에 지니면서 비난을 감수하였다. 전쟁 후 부녀자가 생활고를 이겨내기 위해 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상황과 생계부양자가 된 이들의 모습은 역사에서 읽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