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요약
이 글의 목적은 한국 문학에서 기지촌 주변의 성매매 여성과 아메라시안에 대한 재현을 살피는 것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정치적 함의로서 젠더, 민족, 계급, 인종 등의 권력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나아가 사회적 약자의 고통과 저항의 개념을 재해석함으로써 그들의 삶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자 한다. 이 글은 1945년 이후 기지촌을 주제로 한 문학 작품을 크게 민족주의 시각, 여성주의 시각, 가능성의 정치(the politics of possibilities)의 함의를 갖는 시각으로 분류한다. 기지촌 성매매에 대한 타자화된 문제의식과 해석이 보이지 않는 가능성의 정치의 함의를 갖는 작품 분석을 통해 기존의 두 시각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민족주의 시각은 대부분의 중산층 남성 작가들의 작품에서 나타난다. 대체로 남성 서술자가 주인공이며 민족 문제가 가장 큰 사회 모순으로 대두되어 미군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성격이 강조된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배타적인 민족국가 단위로 사고하며 한국 민족 내에서 발생하는 가부장적 폭력은 은폐된다. 여성은 생물학으로 규정된 인종 개념에 바탕을 둔 민족국가의 재생산을 위해 상징적·물리적으로 동원된다. 이때 가부장적 성 규범과 계급 차에 근거한 정숙한 부르주아 여성 대(對) 성적으로 문란한 노동 계급이라는 이분법이 작동하면서 성매매 여성은 보호할 가치가 없는 경멸의 대상이 된다. 1990년대 이후 여성주의 시각의 작품과 몇몇 비평이 민족주의 시각의 가부장적 성격을 지적하고 성매매 여성 자신의 체험과 목소리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여성주의 시각은 대부분의 중산층 여성 작가의 작품에서 보이며 성매매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미군/미국의 폭력뿐 아니라 한국 민족 내 가부장적 폭력에도 민감하며 성매매 여성의 일상과 심리가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성매매 여성의 저항의 문제를 타당하게 제기하였으나 반사적인 저항 개념을 전제하고 있으며, 의도적인 계몽성과 다른 계급에 대한 관조적 이해로 비판하고자 한 민족주의 시각의 작품들과 공통점이 있다. 가능성의 정치의 함의를 갖는 작품은 여성의 경험과 목소리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기존의 여성주의 시각과 동일하지만 성매매 여성의 고통과 삶에 대해 타자화된 분노, 연민, 자조와 냉소로 표현되는 고통에 대한 과장, 저항과 주체성에 대한 의도적인 강조가 없다. 성매매 경험이 있는 여성과 아메라시안의 자서전뿐만 아니라 무의식적 휴머니즘의 발로에서의 성매매(박완서), 인간으로서 신뢰할만한 존재로 미군이 등장하는(김소진) 등 다양한 현실이 그려지는 작품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회적 약자가 반드시 침묵을 깨고 목소리가 들려지는 것이 해방적인 행위라는 저항 개념은 한계가 있다. 이 글은 사회적 약자의 저항 양식으로 고통의 다스림 (domestication of suffering)을 제시한다. 이 개념은 표현 그대로 고통과 폭력을 회피하거나 마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다스린다는 것이며 다음의 전제들을 갖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고통과 폭력의 경험은 극적으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상에서의 폭력의 수용과 대응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이때 고통은 항상 부정적이고 제거되어야 하는 것만이 아니며 그것을 기꺼이 수용하고 다스려갈 때 치유와 창조적 힘으로의 전환이 가능하다고 본다. 가난이라는 구조적 폭력을 소명으로 받아들인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과 아메라시안을 낳아 겪어야 했던 사회적 모욕을 받아들이고 현실을 직시한 어머니와 혼혈인인 자신의 고통의 다스림을 묘사하고 있는 김 엘리자베스의 『만 가지 슬픔』이 대표적인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