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를 통하여 식민지 시대의 이 땅에 파종된 무정부주의의 모습을 천착(穿鑿)하고자 한다. 그가 기초한 「조선혁명선언』과 그 주체인 조선의열단의 노선, 그리고 1927년을 전후하여 그가 마지막 의지처로 생각했던 동방아나키스트연맹에서의 언행과 저작을 통하여 일제 치하에서의 한국 무정부주의의 현실과 이상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의도이다.
신채호의 무정부주의에는 당시 식민지지배 아래서의 지식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상적 습합(習合)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그의 사상은 당시 한국에 유입된 양계초(梁啓超)의 영웅주의, 크로포트킨(Count Kropotkin)의 민중주의적 연민과 상호부조론, 고도쿠 슈스이(辛德秋水)의 폭력혁명론, 이석증(李石曾)의 생물학적 진화론 등을 융합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식민지 시대의 무정부주의가 매우 정치(精緻)하고 논리적으로 완성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학통으로 보면 고토쿠 슈스이를 잇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신채호의 폭력혁명론은 그의 사상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업장(業障)처럼 따라 다니고 있다. 식민지 시대에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좌절된 후 최후의 방법으로 폭력 또는 테러리즘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잘못된 일도 아니고 비난 받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 투쟁에 대하여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이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이다.
신채호의 무정부주의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와 어떻게 연계되어 있고 어떻게 다른가에 대하여는 당사자인 신채호도 혼동하고 있고 후세의 평가도 각기 다르다. 신채호도 계급 투쟁이나 평등과 같은 사회주의적 입장을 밝힌 바 있고, 당시 무정부주의자들은 사유 재산을 부정하고 계급 철폐를 주창하는 등 사회주의적 요소를 표방하는 일이 흔히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무정부주의가 사회주의와 혼재·혼용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할 때 식민지시대의 한국의 무정부주의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거부와 혐오감이 그 본질을 이루고 있는 것이지 정확히 권력이나 또는 정치(정부·국가)에 대한 거부나 혐오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신채호를 비롯한 한국의 무정부주의는 정통 논리로부터 다소 빗겨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