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은 1867년 3월 구한말 이른바 삼한갑족(三韓甲族)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 1932년11월 중국 대련(大連)에서 고문사할 때까지 일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쳤다. 그는 전국규모의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결성한 이후 헤이그 밀사파견과 고종의 중국망명 등을 계획해 실행했으며, 6형제 일가 모두 서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데 공헌하였다. 이후 베이징에서 아나키즘 사상을 수용한 뒤 의열단과 다물단을 지도하고 재중국무정부주의연맹과 동방무정주의자연맹, 남화한인청년연맹 등을 조직·지도하며 직접행동에 입각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유학자였던 이회영은 베이징에서 아나키즘 사상을 수용한 이후, 아나키스트로서의 또 다른 삶을 살았다. 그는 정부라는 행정조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자유연합적 독립운동 지도부를 주장하며 임시정부 구성에 반대하였다. 또한 코민테른의 지시에 의해 움직이는 공산주의 세력을 비판하며 민중에 의한 직접혁명과 무장독립투쟁 노선을 추구하였다. 그의 반임정, 반공산주의 인식은 의열단과 다물단의 지도와 재중국무정부주의연맹 활동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민중적 자유연합과 민족간 연합주의를 통해 국제주의, 사해동포주의를 실현하려는 그의 인식은 동방무정주의자연맹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나아가 상하이 노동대학과 취안저우 민단 편련처 운동을 후원한 점에서도 무정부공산사회를 꿈꾸는 그의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 재건에 강한 애착을 갖고 이상촌 건설과 독립운동 기지 확보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1921년 베이징 영정하(永定河) 개발과 1923년 후난성 양따오촌 건설계획, 그리고 1925년 김창숙과의 내몽고 생활근거지 조성 계획 등이 그것이다. 이는 아나키스트들이 추구하는 공동생산·공동소유의 이상촌 건설을 통해 안정적인 항일근거지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과 기대 때문이었다. 독립기지 건설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그는 평소의 신념과 아나키즘 사상에 따라 1932년 적지 한가운데인 만주행을 감행하여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