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0월 미소공동위원회는 최종 파열되었다. 남한단독정부수립이 현실화하는 상황에서, 안재홍은 '순정우익'의 개념으로 중간우파의 이념지표를 제시하며 이들을 정치세력화하려 하였다. 그는 남한에 수립되는 단독정부-분단정부가 민족사의 정통성을 획득하려면, 남한에 민주역량을 강화하여 진정한 민주주의를 정착시킬 수 있는 세력이 신정부 수립의 주체가 되고, 이들이 통일정부를 세우는 주도력이 되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안재홍이 '순정우익 집결'을 외치는 현실인식은, 단독정부수립노선을 추진하였던 '보수 극우' 세력이 신정부 수립의 주체가 되어 신생정부를 구성한다면, 민주주의 정착은 요원하며 통일정부수립도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말미암았다. 이는 새로 수립될 남한단독정부-이후 대한민국으로 귀결되는-의 주체, 즉 정부수립과 국가건설의 주도력을 어떠한 구심점으로 형성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 5·10선거를 거쳐 신생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안재홍의 신국가건설운동은 대한민국정부수립의 주체를 결집하려는 활동이었다.
안재홍의 정치노선은 해방정국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미소 파탄' (미국과 소련 사이의 협조 체제가 파탄으로 끝났다는 의미의 당시 용어임)의 길목에서, 책임 있는 지도자라면, 한민족도 민족분단의 길머리에 들어섰음을 냉철하게 인식·통찰하며, 국제정세의 규정력 앞에서 민족 진로의 방향과 방안을 제시해야 했다. '미소 파탄'하는 끝막까지 분단정부를 거부하고 통일정부를 주장하며 실천한 민족지도자는 많았으나, 이에 대응하여 분단국가에서 통일국가로 나가야 할 비전과 구체안을 제시한 예는 많지 않았다. 이 점에서 안재홍은 해방 정국에서 그와 정치노선을 함께 했던 많은 지도자들과도 차별성을 지니는 독자성을 지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