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3년에 제1차 파저강 토벌에서 완승을 거둔 세종은 그러나 4년 뒤인 1437년에는 '실패' 하고 만다. 같은 대상을 놓고, 비슷한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벌인 전투가 한번은 성공하고 한번은 실패한 것이다. 이 글은 그 이유를 분석하기 위해 제1,2차 토벌이 준비되고 진행되는 6개월 동안의 왕과 신료들 사이의 의사소통내용 216건을 분석했다. 그 결과 세종의 의사결정은 두 가지 점에서 달랐음을 발견했다. 첫째, 세종은 제1차 토벌 때 수직적·수평적인 의견교환 채널을 모두 활발히 가동했던 데 비해, 2차 토벌은 왕과 현지 지휘관들 사이의 수직적 의견교환만이 있었다. 둘째, 제1차 때 현지사령관 최윤덕에게 많은 재량권을 부여한 것과 달리, 제2차 토벌 때 사령관 이천은 거의 재량권을 갖지 못했다. 제1차 토벌 때 얻은 북방지역에 대한 정보와 승리한 자신감 때문에 왕이 세세한 내용까지 지시했다. 그 결과 1차 토벌 때와 달리 제2차 토벌은 전과도 크지 않았을뿐더러, 결정적으로 전투의 목적이었던 여진족 추장 이만주를 놓치고 말았다. 일종의 '승리의 역설'이 작용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