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비슷한 시기에 일본 유학을 하고, 유학시절 언론과 문필활동을 활발하게 했던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에 대한 조선인 사회에서의 기대감 속에서 이들을 ‘동경삼재’라고 불렸다. 하지만 1920년대 조선 사회에 대한 ‘분열’을 획책했던 일제의 ‘문화정치’ 속에서 이들 ‘동경삼재’는 각기 상이한 정치적 선택을 하게 된다. 이광수는 ‘타협적’ 민족주의자의 일원으로 일제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의 ‘자치’를 주장하는 방향으로 전환했으며, 최남선은 단군과 ‘불함문화론’ 연구를 통해 일본인 학자의 조선에 관한 연구에 학문적으로 대결하고자 했으나 ‘비정치적’ 학문 연구는 점차 일본 관학자의 입장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반면 사회주의 사상 연구와 사상단체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홍명희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의 일원으로 1920년대 후반 민족통일전선의 일환인 신간회 활동에 지도부로 참여했다.
1920년대 ‘동경삼재’의 정치적 선택의 과정을 본고에서는 공간과 사회주의에 관한 입장 차이에서 살펴보고자 했다. ‘동경삼재’는 3·1운동을 전후 한 시기, 당시 민족운동가 일반이 그러했듯이, 망명과 투옥을 경험했다. 이광수는 중국 上海에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해서 그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책임자를 지냈다. 당시 『독립신문』에 게재된 논설 가운데 상당수가 이광수가 집필한 것이고, 이를 통해 볼 때 상해시절의 이광수는 ‘절대 독립’과 독립전쟁 노선을 지닌 안창호와 입장을 같이 했다. 따라서 귀국 후 이광수가 1920년대 주장한 ‘준비론’, ‘실력양성론’의 입장은 일제의 ‘문화정치’란 시대적 상황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최남선과 홍명희는 수감생활을 통해 향후 민족운동의 방향성을 재정립하는 계기로 삼았다. 최남선은 수감기간 일제와 학문적 대결을 준비하는 ‘조선학’ 연구의 토대를 구상했고, 홍명희는 출옥 후 언론활동과 함께 민족운동의 가장 선진적인 사상단체에 적극 참여하여 신사상을 학습 소개하고자 했다.
한편 선행 연구에서 주목되었듯이 타협적 민족주의와 비타협적 민족주의 사이의 간극은 사회주의에 관한 인식과 이를 통한 민족통일전선에 관한 입장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민족주의 계열의 수양동우회 기관지인 『동광』에 지속적으로 사회주의를 소개하는 기사가 연재 혹은 기고되었으며, 1920년대 초반 최남선 역시 잡지 『동명』을 통해 신사상의 일환으로 사회주의 사상의 소개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 이후 이광수와 『동광』의 편집진은 민족주의 계열의 ‘정치적’, ‘경제적’ 운동이 침체되는 상황에서 그 원인을 사회주의에서 찾았으며, 최남선은 조선적 특수성을 연구하는 ‘조선학’ 연구에 대비되는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의 ‘국제주의’를 비판했다. 즉 이광수와 최남선은 당대 조선 사회에서 경쟁 대립해야 하는 볼셰비즘과 조선인 사회주의자의 활동에 대립의 각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양자 사이에는 ‘통일전선’에 관한 생각에서 차이를 보였다. 타협적 민족주의의 경향을 지닌 이광수는 통전에 관해 비판적인 입장을 지녔다면 최남선은 통전이 지닌 민족운동에서의 기대 효과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이러한 차이가 신간회 활동에 적극 참여했던 홍명희가 비록 정치적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최남선과 ‘교유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되었다.After the March First Movement in 1919, the Japanese Colonialism changed their policy from the militarism to the cultural policy . At that time, Korean nationalists and Socialists established journalistic media such as the vernacular newspapers and magazines and political organizations. I would like to want to read Hong Myung-hwi(1888~1968), Choi Nam-son(1890~1957), Yi Kwang-su (1892~1950)’s activities in 1920s under the cultural policy (Munwha Chungchi). They(Three Korean geniuses) had lived as poet, novelist, publisher, editor, teacher, and historian through their whole life. However, during the 1920s, they had a key role among the leaders of Korean nationalists against the Japan Imperialism.
They had a key role in Korean national movement such as Match First Movement in 1919. Because of these activities, Yi Kwang-su left Japan and went Shanghai in China for political struggle. Both Hong Myung-hwi and Choi Nam-son were imprisoned. Frustrated with exile nationalist politics, Yi decided to return to Korea in the spring of 1921. Yi’s returning made an instant sensation. Therefore, in the middle of 1920s, they each others worked in Seoul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However, the Three Korean geniuses became estranged each other because of the different understanding on the socialism and the future of Korean nation. Analyzing these three Korean geniuses in Tokyo will help deepen our understanding of Korean nationalists’ cultural activities in the early 20th century. Moreover, the future work on the Thee Korean geniuses in Tokyo should focus on their thoughts and activities between Japan colonial period and the liberation of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