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1501-1570)와 율곡(1536-1584)의 현실정치에 대한 태도는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퇴계가 황폐되어진 당시의 정치현실을 피해 주자의 학문세계에 침잠하였다면, 율곡은 당시의 정치현실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 과정에서 퇴계와는 달리 지나간 역사 속에서 그 해결책을 찾았다. 결국 퇴계와 율곡의 가장 큰 차이점이 두 사람간 이(理)와 기(氣)에 대한 이해의 거리에 있기보다는, 정치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율곡은 퇴계가 학문 일변도로 군주의 길[君道]을 제시한데 대하여 군주의 길은 학문뿐만 아니라 바로 정치에도 있음을 강조한다. 퇴계는 철저하게 군주 1인의 수신(修身)이란 측면에 경도되어 있었다. 퇴계는 학문의 본말에 대해서만 언급하였지 위정의 선후에 대해서는 등한시하였다. 성학십도의 그 어디에도 위정의 선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기에 족하다. 하지만 율곡은 항상 학문의 본말과 위정의 선후를 강조하였다.
퇴계와 율곡에게 군주의 수신이란 측면은 공통적이다. 하지만 율곡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동체를 지향하였다. 즉 율곡의 군도론의 특징은 바로 위정을 위한 수신이란 점이 중요한 특징이다. 결국 율곡의 「성학집요」는 퇴계의 「성학십도」가 학문의 본말(本末)만을 서술한 것에 정치의 선후(先後)문제를 더하여 완성한 것이다.
율곡에게는 두 개의 근본이 있었다.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지만 정치의 근본은 임금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율곡의 이기론(理氣論), 심성론(心性論) 등은 모두 율곡 자신의 위정관(爲政觀)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을 뿐이지, 결코 관념적인 철학이론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