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谷 金壽恒(1629~1689)은 인조 7년에 태어나 병자호란을 겪고, 효종 현종 숙종대 정치를 주도하였던 인물이다. 이때는 栗谷 李珥(1536~1584)가 저술한 『성학집요』로 대표되는 조선성리학이 완성되던 시기로, 조선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이상사회를 이루려는 사림들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예치를 추구하고 있었다.
당시 정치적으로는 산림을 경연관으로 삼는 경연정치가 발달하였고, 경제적으로는 이앙법 시비법의 발달로 식량이 스스로 충당되고 전국에 면화재배가 확산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종법사상에 입각하여 종가집을 기반으로 하는 농업공동체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사림들이 서원을 세워 학문을 연구하며 농업공동체를 주도하였고, 문화적으로는 조선중화주의를 바탕으로 동국진체 동국진경 청화백자 국문소설 판소리 한복 한식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조선 고유문화가 창출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가운데, 조선성리학 이념에 충실하였던 尤庵 宋時烈(1607~1689)과 함께 대동법 시행, 양반호포제, 노비종모종양법, 궁방전 개혁, 환곡을 비롯한 구휼정책 등 자주적인 개혁을 주도하였던 정치사상가가 문곡 김수항이었다.
문곡은 척화파의 종장인 淸陰 金尙憲(1570~1652)의 손자이다. 김수항의 從祖父는 金尙容이다. 김상용의 외손녀가 孝宗紀 仁宣王后이다. 따라서 현종의 어머니 인선왕후는 김수항에게 실질적으로 內從 6寸이 되는 관계이다.
문곡은 효종대에 급제하여 이조정랑과 홍문관 부교리 수찬 승정원 승지 등 요직을 거치며 효종대를 주도해갔다. 그는 한당인 金堉(1580~1658) 등과 대립하면서 송시열 宋浚吉(1606~1672) 등 산당 세력을 초빙하고 유계를 사면 복권시켜 당시 개혁을 주도하게 하였다.
현종대에는 승지 도승지를 역임하면서 34세에 대제학을 역임하며 예조판서 이조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현종 13년에는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문곡은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에서 우암 송시열과 입장을 같이하여 許穆(1595~1682) 尹휴(1617~1680) 尹善道(1587~1671)와 대립하였으며, 송시열 송준길 등과 함께 세자 보양관을 지내고 세자 사부가 되었다. 영릉 천장 문제가 발생될 때에는 송시열 등과 거취를 같이하며 남인 등 반대세력에 대항하였다.
숙종대에는 갑인예송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득세하자 송시열을 옹호하고 윤휴 許積(1610~1680)과 대립하다가 유배를 갔다.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득세하자 영의정으로 정국을 주도하였다. 노론 소론이 갈리고 회니시비가 일어나자 尹拯(1629~1714)을 비판하면서 송시열을 적극 옹호하고 탕평을 추구하다가 기사환국으로 유배가 죽게 된다.
갑술환국 이후 문곡이 신원됨에 따라, 그 아들들이 숙종대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