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반구장경병은 고려자기를 대표하는 기종 중 하나로 언급될 만큼 현존하는 유물의 수가 상당하다. 그러나 편년자료가 드물고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며 良質보다는 粗質이 많아 지금까지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해왔다. 여기에 더해 盤形 구연의 병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하는 명칭의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현재는 ‘廣口甁’과 ‘盤口甁’이 혼용되고 있는 실정인데, 이 중 ‘광구’는 단순히 구연이 넓다는 뜻으로 이 용어만으로는 구연의 형태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구연이 소반처럼 옆으로 벌어지다가 꺾여 올라간다는, 외형적인 특징을 잘 드러내 주는 ‘盤口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겠다.
자기질의 盤口長頸甁은 강진 용운리, 부안 유천리, 대전 구완동, 용인 보정리 등 남부지역 토축요에서 화형발, 한국식 해무리굽완 등과 함께 출토된다. 그래서 벽돌 가마 출토품들과는 달리 도기적인 造形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우선 자기질임에도 불구하고 扁甁이 확인되며 早期 기형의 경우에는 陶器印花文盤口長頸甁에서 보이는 卵形 동체로 제작되기도 한다. 이 외에도 구연부에 시문된 돌대장식, 사선으로 벌어지는 높은 다리굽, 경부와 동체를 따로 만들어 부착하는 성형방법 등은 통일신라시대 도기병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다.
고려시대 여러 소비유적 중 자기반구장경병은 고분에 집중되어 있다. 산성이나 사찰, 건물지 등에서도 발견되기는 하나, 이들은 대부분 자기질이 아닌 도기질이며 도기질의 반구병 중에서도 短頸扁甁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생활용기로서의 사용유무를 차지하고, 기물이 발견되는 출토지의 성격으로 볼 때 자기반구장경병은 부장ㆍ의례를 목적으로 생산ㆍ소비된 기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기반구장경병이 가지고 있는 부장품으로써의 중요성은 고려시대 묘제 변화와 긴밀히 연결된다. 묘제에 대한 규제가 엄격했던 고려 전반기에는 병류 1점과 완ㆍ발ㆍ접시 등의 소형 기물이 1점씩 조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회의 혼란과 더불어 묘제의 규제가 약화되자, 고려 중기부터는 토광묘가 확대되고 부장유물의 종류와 개체량 또한 증가한다. 이와 같은 고분문화의 보편화는 자기반구장경병의 생산과 소비를 촉진시켰고, 이로 인하여 고려 중기 이후에는 병의 제작량 증가와 함께 質도 떨어지게 된다. 결국 자기반구장경병의 조질화는 부장문화의 확대, 토광묘의 증가 그리고 이에 따른 부장유물의 소비증대에 기인한 사회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기반구장경병의 활발한 소비는 해저 인양유물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접이나 접시 등과 같은 소형기에 비해서는 많지 않으나, 출토ㆍ전세된 병의 개체량이 상당하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도 동일지역 생산품으로 추정되는 자기반구장경병들이 발견되고 있어 해로를 통해 전국 각지로 운반ㆍ유통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기반구장경병에 有文의 비율(47.27%)이 높다는 점 또한 주목된다. 특히 이 중에서도 철화문이 두드러지는데(有文 병의 62.80%), 철화문은 시문되는 기종에 제한이 있고 고분뿐만 아니라 제사유적에서도 확인되어 의기적인 성격이 강한 장식기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철화문의 이러한 특이성은 자기반구장경병의 역할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반구장경병은 기형과 문양, 공반유물의 양상 등을 근거로 크게 4期(Ⅰ기~Ⅳ기)로 형식 분류된다. 고려 전반기에 만들어진 병은 대체로 어깨의 벌어짐이 크고 다리굽이 붙어 있으나, 고려 중기 이후 점차 평저가 증가하고 어깨를 깎음 정면하거나 저부를 외반 시키는 등 기형이 다양해진다. 또한 Ⅰ기에는 자기반구장경병이 고분출토 병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점차 매병?유병 등을 함께 이용하게 되었고 결국 Ⅳ기에 이르면 자기반구장경병이 감소하는 대신 외반구연의 병이 다량 생산되게 된다. 이렇게 반구장경병은 부장품으로서의 역할을 외반구연병에게 내어주면서 쇠퇴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반구장경병이 언제까지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분청자에서 보이는 상감문양이 자기반구장경병에는 나타나지 않고, 고려 말기 고분에서 발견되는 병이 대부분 외반구연의 것임을 생각해 볼 때 14세기 중후반 이후에는 생산이 중단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Bangujangkeng Bottle appeared along with Haemurigup Bowl around the mid to late 11th Century in the clay-built kiln of southern province. For that reason, Bangujangkeng Bottle contains earthenware components such as Doldae decoration, diagonally-spreading high foot, and flattened side although it is a chinaware. Its form varies along different eras. Most of the early Goryeo bottles have wide shoulders and attached Dari-gub, but as time period advanced, the shapes were diversified by flat bottom, neat shoulder cut, and the lower part stretched outwards.
The changes seen with Bangujangkeng Bottle are associated with the expansion of the ancient tomb culture. During Goryeo Dynasty, the restriction of the grave style according to the social class lessened as the society's stability weakened. So a number of the common class adopted the grave style of noble class. As a result, pit tombs and burying supplementary materials became popular. To complement all the demands, Bangujangkeng Bottle was created in the local kilns. And the expanded demands tended to lower the quality. Therefore, Bangujangkeng Bottles with decreased qualities were found in ancient tombs, where they were used as a part of supplementary burial items.
High percentage of Bangujangkeng Bottle has patterns, and the fact that underglazed iron painting(cheolwha) takes about 60% of all patterns within Bangujangkeng Bottle should not be overlooked. Iron painting is only decorated on limited kind of chinawares and are found mostly in funeral relics and ancient tombs. Therefore it may have been decorated on Chinaware for ceremonial purposes. Considering the excavated locations and patterns on the vessel, Goryeo Dynasty Bangujangkeng Bottle is created as one of the supplementary burial items for the general popu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