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에서는 농경사회로 인식되고 있는 청동기시대의 토기를 대상으로 복제법을 이용하여 압흔을 분석하고, 이를 통하여 당시 사회의 식물 이용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분석 결과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돌대문토기 단계의 벼와 기장이 확인되어, 신석기시대 이후로 조, 기장의 재배에 벼가 더하여졌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벼가 확인된 주거지는 돌대문토기 단계 중에서도 이른 시기에 해당하여 벼의 이용이 돌대문토기 단계 성립의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추정되었다. 더불어 돌대문토기가 출토된 취락들은 대부분 벼농사에 적합한 하천 주변의 충적대지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 단계에 논농사가 도입되었을 가능성도 언급하였다.
둘째, 토기에 찍힌 압흔의 위치를 바탕으로, 제작 중의 토기를 의복 위에서 조정하거나 작업대 위에 토기를 두는 경우, 점토 반죽 시에 혼입될 가능성 등을 상정하였다. 또, 청동기 시대 이른 단계의 토기에서 상대적으로 다수의 압흔이 관찰되는 이유에 대하여, 전기 이후 토기를 제작하는 공동 작업장에 더 이상 곡물이 흩어져 있지 않은 상황과 토기 제작 장소가 별도의 공간으로 분리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한편, 토기 제작의 계절에 대해서는 곡물 이외에도 가을에 관찰되는 열매의 압흔이 확인되어, 수확 종료 후의 가을, 즉 농한기에 토기를 제작한다는 제작 주기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일본열도 농경과의 관계에 대하여 벼의 확실한 사례가 한반도의 돌대문 토기 단계와 이에 병행하는 조몬시대 후기 후반에 등장하기 때문에, 이 시기를 벼 이용의 획기로 상정하였다. 그리고 일본열도에서는 조의 사례가 매우 적고 기장의 이용도 야요이 시대 이후에나 확인되는 것에 반해 한반도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조·기장의 이용이 성행하여, 양 지역 농경의 차이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었다.